“그 사람들의 죄”[횡설수설/이진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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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곳이 국가다. 어릴 적 등 뒤에 숨으면 언제나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부모나 형처럼 든든한 존재라고 할까.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관계 기관 홈페이지에 숱한 사람들이 억울한 사연을 올리는 것은 나를 지켜달라는 절박한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심정은 어떨까.

▷지난달 26일 팀 감독 등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철인3종 경기 고 최숙현 선수가 6차례나 관련 기관에 진정을 넣었지만 모두 건성으로 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2월 소속 팀을 운영하는 경주시청을 시작으로 검찰 등 수사기관과 대한철인3종협회 등 관련 체육기관에 호소했지만 진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 준 곳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최 선수는 생을 마감하기 전날인 지난달 25일에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선수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딸을 대신해 경주시청에 진정을 넣은 최 선수 아버지는 “팀이 전지훈련을 갔는데 다 불러들일 수 있느냐. 고소하려면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이런 것은 벌금 몇십만 원짜리밖에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는 코로나19로 관련자들을 부르기 어려우니 피해 내용은 경찰 수사로 대신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클린스포츠센터로 ‘퉁’쳤다. 그러는 사이에 넉 달이라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고, 최 선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지난 수년간 체육계에서 폭행 성폭력 등 각종 비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부는 근절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특히 지난해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였던 심석희, 여자 유도 선수 출신 신유용 등의 체육계 미투가 터지자 경기단체들에 대한 전수조사까지 벌이고 자정 능력이 없는 대한체육회 등을 대신해 스포츠윤리센터를 설립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워낙 학맥 인맥으로 칡뿌리처럼 얽히다 보니 눈감아주기가 여전한 데다 우승과 메달이라는 성적 지상주의도 폭행이나 체벌이 사라지지 않고 관행처럼 내려오게 하는 이유라고 한다.

▷최 선수가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남긴 말은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였다. 엄마가 무슨 힘이 있으랴마는 국가기관에 외면 받은 20대 청년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곳이 가족 외에 달리 있었을까. ‘그 사람들’에는 감독 등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절박한 호소를 귀담아듣지 않은 기관들의 무책임과 방관까지 포함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국가#죄#청와대 국민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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