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순간이지만, 비난은 영원하다[광화문에서/이헌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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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선수 수십 명이 몸을 풀고 있었지만 모든 이의 시선은 오직 그에게 쏠렸다. 2016년 4월 미국프로야구 트리플A 더럼 불스 애슬레틱파크에서 만난 강정호(33)에게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재활과 훈련을 돕는 트레이너 3명이 따라붙었다. 다른 선수들은 훈련 틈틈이 힐끔힐끔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모든 마이너리거들이 꿈꾸는 ‘메이저리거’였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그의 가장 상위 레벨이긴 하지만 트리플A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연봉 10만 달러(약 1억2000만 원)를 받는 선수도 많지 않다. 티켓 값이 저렴한 비행기로 이동하며, 식사 등 지원도 부실한 편이다. 메이저리그 주전급 선수가 컨디션 점검차 마이너리그에 내려오면 푸짐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전통도 그래서 생겼다. 강정호 역시 팀 선수단 전원에게 고기 식사를 대접했다. 재활을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복귀한 강정호는 그해 21홈런에 62타점을 기록했다.

탄탄대로 같던 그의 야구 인생은 그해 12월 국내에서 저지른 음주 뺑소니 사고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조사 과정에서 이전에도 두 차례 더 음주 운전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비자 발급이 거부돼 2년 가까이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2018시즌 막판 가까스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지만 부진 끝에 방출됐다.

갈 곳을 잃은 강정호는 사과 기자회견까지 열며 국내 프로야구 복귀를 타진했지만 성난 여론을 바꾸지는 못했다. 유일하게 돌아갈 수 있었던 원소속 구단 키움마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스스로 복귀 의사를 철회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과정보다 결과, 공정보다 특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프로야구 초창기 타격왕 밀어주기를 했던 한 노(老)감독은 “비난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야구판은 그의 말처럼 움직였다. 음주 사고를 쳐도, 폭행에 연루되어도, 약물을 복용해도 야구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평생 야구를 잘해 온 강정호도 안이하게 생각했다. 음주 뺑소니 사고 직후 그의 첫 반응은 “야구로 보답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구단은 눈 딱 감고 그를 받아들일 만도 했다. 순간의 비난을 넘기면 팬들은 다시 성적에 환호할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팬들의 눈은 높아졌고, 소셜미디어 등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소통 수단도 크게 늘었다. 어쩌면 이번에 강정호의 복귀를 막은 것은 KBO도, 구단도 아닌 팬들의 힘이었다.

2015시즌 미국에 진출한 강정호는 여러모로 ‘롤 모델’과 같은 선수였다. 팀에는 거액의 응찰액 500만2015달러(약 60억 원)를 남겼고, 선수들에게는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해줬다. 김현수(LG·전 볼티모어), 박병호(키움·전 미네소타), 이대호(롯데·전 시애틀), 황재균(KT·전 샌프란시스코) 등이 그의 뒤를 이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잃은 그는 반면교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번 사태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선수들은 지금 ‘실수는 순간이지만 비난은 영원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강정호 음주운전#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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