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核 거머쥔 김정은 폭주 막을 韓美동맹 무너질 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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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포기 절대 불가’ 金 본색 드러나도 文과 외교안보 수뇌부는 모르는 척
‘동맹=돈’ 협박하는 트럼프 재선되면 核무장 등 국가 생존전략 고민해야

박제균 논설주간
박제균 논설주간
어떤 도시의 최고 실력자 T. 돈과 권력을 장악한 그에게 거칠 것이 없다. 다만 뒷골목의 황태자 K가 성가시게 하는 걸 빼곤. 걸핏하면 T의 집에 횃불을 던져 불을 싸지르겠다고 협박한다. 처음엔 흘려들었는데,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실행 준비를 착착 해나가는 품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럴 때 K의 이웃 M이 나섰다. 옆집에서 완력을 과시하는 K가 두렵기도 하고, 어떻게든 이웃끼리 잘 지내보려고. K가 가장 원하는 게 T에게 인정받는 것이란 점을 간파한 M은 T를 찾아갔다. “K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무장해제 의사가 있다.” K를 찾아가선 이렇게 말한다. “T가 만나고 싶어 한다. 당신을 인정해줄 의사가 있다.”

결국 만난 T와 K. T는 K에게 “무장해제부터 하라. 그러면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K는 T에게 “먼저 인정부터 하라. 무장해제는 그 다음”이라며 버텼다. 결국 싸늘하게 돌아선 두 사람. 모두 ‘M에게 속았다’고 느낀다. 다급해진 M. 양쪽에 다시 한번 만나보라고 매달렸으나 이미 신뢰를 잃은 뒤. 화가 난 K는 M의 집 담장을 때려 부수며 “네 돈부터 내놓지 않으면 너부터 손볼 것”이라며 눈을 부라린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 드러난 한미북(韓美北) 3국 지도자의 협상과 중재 실패 과정을 단순화해봤다. 이런 일은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왕왕 벌어지기 때문. 그럴 때 M 같은 중재자는 ‘여기서 이 말 하고 딴 데서 저 말 하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찍힌다.

볼턴 회고록을 곧이곧대로 믿느냐고? 대체로 믿는다. 볼턴은 북한에 유화적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실무안(案), 즉 ‘비건안’이 채택되지 못하도록 사전공작을 벌인 일까지 기술하는 등 비교적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출신으로 미국 지상주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전형적인 매파다. 협상의 디테일을 ‘창작’할 스타일은 아니다.

그의 회고록을 통해 결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김정은의 속내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비건안’이든 ‘빅딜안’ ‘스몰딜안’이든 실질적으로 북핵을 건드리는 어떤 제안도 거부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할아버지 대부터 몽매에도 원했던 ‘절대무기’를 자기 대에 완성했는데 그걸 포기할 리 만무다. 핵이 없는 북한은 아무리 한국과 국제사회가 도와준다고 해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핵 보유는 굶주린 인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하는 김정은 왕조의 통치 신화다. 그걸 포기했다간 권좌까지 위험해질지 모른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외교안보 수뇌부만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문 정부 외교안보·대북정책의 틀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에. 그러니 문 대통령이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북의 비핵화는 쏙 뺀 채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것 아닌가.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차라리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한다, 그래도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핵보유국 북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건 한미동맹뿐이다. 그 동맹이 문 정권 출범 후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볼턴 회고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싸운 뒤 왜 우리(미군)가 아직도 거기에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한미동맹에 대해 무지하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며칠에 한 번씩 되물을 정도로 관심조차 없다.

트럼프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한국에 돈을 달라고 할 좋은 타이밍’이라고 했고,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를 못 받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보호해줄 테니 돈을 내라’는 조폭적 동맹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재선된다면 한미동맹의 명운(命運)은 벼랑 끝에 걸릴 것이다. 그 경우 한국도 자구책 마련을 위한 실존적 고민을 하는 게 마땅하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따지고 보면 핵을 막는 데는 핵만 한 것이 없다. 공포의 균형이다. 우리가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미국 등 국제사회의 엄청난 제재와 일본 등 주변국의 핵보유 도미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트럼프는 다른 나라를 보호하는 데 미국 돈을 쓰느니, 그 나라가 핵무장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큰 기류가 바뀔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 핵무장을 추진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런 경우의 수를 포함한 국가의 생존과 영속 전략을 누군가, 어디선가 고민하고 있어야 나라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김정은 폭주#韓美동맹#외교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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