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메갈리아’식 여성혐오 편집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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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성 혐오’ 살해 논란… 조현병 환자가 어린이 죽이면
‘어린이 혐오’가 되는가… 조현병 살인 재발 막으려면
정신질환자 관리에 초점 맞춰야… 격리 이뤄져야 사회 안전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박해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불안해한다. 편집증이 정신병적 단계에 이르면 조현병(調絃病)이라고 부른다. 강남 ‘묻지 마 살인’ 사건은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여성 혐오’로 규정하고 끝까지 억지를 부리는 것 역시 편집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자는 체포된 직후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가 정신병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로 몰아가는 몰이는 계속됐다. 한 신문은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은 포스트잇 1000여 건을 촬영해 일일이 문자화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추모공간을 만들어 기념하겠다며 포스트잇을 통째로 서울시로 가져갔다.

색깔이 붉은 훈제 청어(레드 헤링)는 냄새가 독해 사냥감을 쫓던 개가 그 냄새를 맡으면 혼란을 일으켜 사냥감을 놓치게 된다. 여성 혐오라는 잘못된 규정은 레드 헤링 효과를 일으켜 올바른 의제 설정을 방해했다.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할 것인가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뒷전이 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문제로 보는 쪽을 여성 혐오 동조자로 몰아가는 태도다. 경찰은 “정신질환자의 범죄이지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여성 혐오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2년 한 정신질환자가 서울 광진구에서 교회 주차장을 통해 들어가 교회 부설 유치원의 아이들을 칼로 찌른 사건을 취재한 적이 있다. 유치원은 외부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돼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그 유치원은 길가에서 바로 교회 주차장을 통해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정신질환자는 김일성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숨을 곳을 찾아 교회로 들어갔고 준비해 간 칼도 아닌 유치원에 있던 과도로 아이들을 찔렀다. 그가 “아이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식으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김일성으로 보였다면 이것은 아동 혐오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 관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화를 속성(速成)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도시’의 특징을 정확히 이해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도시는 익명적이다.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이 뭘 하는지도 모른다. 그 익명성 때문에 지하철을 타면 자기 옆에 앉은 사람이 정신질환자나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는 곳이 도시다. 도시의 삶은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적절한 격리를 조건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을 쓴 프랑스 학자다. 그가 독창적이었던 것은 서구에서 근대화 초기에 발생한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격리에 주목하고 그런 격리를 서구 근대화의 한 주요한 특징(물론 그에게는 극복해야 할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취약한 것은 여성이 아니라 약자 일반이다. 약자에는 어린이와 청소년, 노인, 장애인도 포함된다. 어떤 경우에는 유치원생이 피해자가 됐고,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 피해자가 됐다. 서구 선진국의 대도시 도심에도 남녀 공용 공중화장실은 많다. 남녀 공용 공중화장실을 없애면 여성이 타깃이 된 범죄가 줄어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해답이 될 수 없다. 범죄는 여성 공중화장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해답은 여성이 아니라 정신질환자에 주목할 때 찾을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일간베스트(일베)와는 대척점에 있으면서 여성 일베라고도 불리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유명해졌다. 메갈리아와 같은 사고방식에 동조한 여론이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단정했고, 더 이상 단정하기 어렵게 되자 경찰을 비판했고, 경찰도 비판하기 어려우니까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 침해를 들고 나왔다.

편집증은 어떤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증상이다. 살인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한번 여성 혐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어떤 진실에도 귀 기울이지 않은 것 역시 편집증적인 증상이다. 누구나 망상은 갖는다. 그러나 정상인은 사실에 맞춰 망상을 수정할 줄 안다. 그래서 정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성혐오#강남살인사건#조현병#정신질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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