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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최영훈의 법과 사람]6·25전쟁 추념공원 만드는 碑木의 소대장

입력 2016-06-25 03:00업데이트 2016-06-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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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예술원 회원인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이하 경칭 생략)은 1964년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입대했다. 편하게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사단장에게 요청해 위험한 수색중대 GP장(비무장지대 경계 초소장) 근무를 자원했다.

한명희 소위가 근무한 곳은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백암산 고지였다. 불과 11년 전 국군과 인민군, 중공군이 치열하게 전투한 곳이다. 땅을 조금만 파면 백골이 나오고 녹슨 철모와 수통, 혁대가 나뒹굴었다. 이 격전의 현장에서 전사한 희생자를 돌로 묻은 가묘(假墓)와 막대기를 꽂아둔 비목(碑木)을 그는 수없이 마주했다.

국민가곡 ‘비목’은 6·25전쟁의 슬픔과 아픔을 절절하게 담았다. 1967년 동양방송(TBC)에서 국악담당 PD로 일할 때다. 전란이 할퀴고 간 참혹한 1950년대를 넘어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 세대들은 포크송 팝송 등 서양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는 외롭게 우리말 노래와 국악 보급에 힘썼다. 함께 가곡 프로를 진행하던 작곡가 고 장일남의 끈질긴 권유로 비목 가사를 쓰게 된다. “달밤에 순찰 돌면 전사자의 원혼이 허공을 떠다니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궁노루 울음소리도 이름 없는 병사의 피어린 절규로 들렸다.” 이때의 체험으로 무명용사의 한을 씻김굿 하듯 그렸다.

PD를 그만둔 뒤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꼬장꼬장한 남산골 딸깍발이 선비를 연상케 하는 한명희는 1997년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낸 바 있다. 2004년 서울시립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뒤에도 열정이 식지 않았다. 지금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 전통음악 교류에 힘을 쏟는다. 거주지인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6000m² 대지에 ‘나라사랑 물망초예술제’ 행사를 주도하는 이미시문화서원을 세워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문화사업을 펼친다.

‘이미시’의 자음인 ㅇ은 하늘, ㅁ은 땅, ㅅ은 사람을 뜻한다. 한명희는 이미시를 통해 전통적인 선비정신의 선양과 풍류문화의 중흥을 추구한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그의 활동은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6년 전부터 이미시 앞마당엔 영원의 불, 호국의 불, 평화의 불이 한시도 꺼지지 않은 채 활활 타오르고 있다.

호국의 불은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화천 비목공원에서 올린 ‘호국영령진혼제’ 향불에서 채화했다. 영원의 불은 같은 해 개천절 화천 해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담아왔다. 그는 이때 경이로운 체험을 한다. “천제를 올리는데 마른하늘에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불가사의한 기적(奇蹟)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평화의 불은 2013년 정전협정 60주년 양구 도솔산 격전지 진혼예술제 후 옮겨왔다.

“6·25, 6·25 호들갑을 떨지만 어엿한 추념공원 하나 없는 나라”라고 개탄하는 그는 6·25를 추념하는 공원과 문예관 등 ‘6·25추념 문화성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위원장, 이인호 KBS이사회 이사장이 그와 함께 한국전쟁추념문화성소조성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영원한 청년’ 한명희는 6월만 되면 추념공원을 채울 콘텐츠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6·25에 1·4후퇴, 백마고지, 다부동전투, 9·28수복, 국제시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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