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불편한’ 영화들 부문별 대상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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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늦더위로 짜증나는 날씨에는 잔혹영화가 제격이다. 왜 피 같은 내 돈 내고 굳이 불편한 영화들을 보느냐고? 끔찍한 악몽의 시간을 경험하고 나면, 내가 처한 비루한 현실이 돌연 따스하고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주엔 참으로 희한한 경험을 사서 해봤다. 보는 사람 불편하게 만들기로 소문난 영화 네 편을 골라서 심야까지 릴레이 관람을 감행한 것이다. ‘아저씨’, ‘악마를 보았다’, ‘엑스페리먼트’, ‘디센트2’. 하루 7시간이 넘게 피 칠갑 장면을 차고 넘치게 보고 오전 2시 극장을 나서니, 울렁증과 성취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들 영화 네 편을 후보로 삼아 부문별 최고와 최악을 꼽아 보았다.》
최고의 ‘대삿발’=단연 ‘아저씨’다. 이웃집 여자아이가 장기밀매꾼들에게 납치되자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특수부대원 출신 전당포 아저씨(원빈)의 얘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원빈이 특유의 소여물 씹듯 우물거리며 툭툭 던지는 대사들은 일품이다.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난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 같은 건지 보여줄게”라든가 “나는 아는 척하고 싶을 땐 모르는 척하고 싶어져” 같은 대사들은 현실적이진 않지만 감정적 폭발력이 굉장히 강했다. 특히 “네 정체가 뭐냐?”는 악당의 질문에 원빈이 “옆집, 아저씨” 하고 답하는 대목은 화룡점정이다.

최악의 대삿발=‘악마를…’이었다. 스토리텔링과 대사에 대한 고민과 세공(細工)이 부족했다. 희생당한 약혼녀의 아버지가 “애비가 30년 넘게 강력계 형사였는데 딸 하나를 못 지키다니…” 하며 자기 캐릭터를 구구히 설명하는 유치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이런 맥락. 주인공이 “네가 받은 고통, 그놈한테 천 배 만 배 돌려줄게” 한다든가, 고통받는 살인마에게 대고 “왜 이렇게 약한 척해? 지금부터 시작인데” 하는 썰렁한 대사 탓에 캐릭터들은 입체감을 확보하지 못한다.

한편, 동굴 속에서 돌연변이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은 ‘디센트2’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일행이 앞에 놓인 검은 동굴을 플래시로 비추면서 “오, 이걸 꼭 해야 돼?” 하는 대사도 최악이었다. 그럼 그걸 안 하면 이 영화가 만들어지겠느냔 말이다.

최고의 구토 유발=머리를 짓이겨 떡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악마를…’과 ‘디센트2’가 접전을 벌였고, 찌른 데 또 찌르거나 때린 데 또 때리는 집요함에서는 ‘악마를…’, ‘아저씨’, ‘디센트2’가 난형난제였다. 종합점수에선 ‘디센트2’가 우승했다. 특히 괴물들이 대변을 집중적으로 싸대는 옹달샘 비슷한 곳에 주인공 일행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지저분함의 백미였다.

최고의 메시지=‘악마를…’과 ‘엑스페리먼트’가 ‘철학’까진 아니지만 가장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악마를…’은 괴물에게 복수를 하다가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철학자 니체의 언명을 구체화했고(사실, 이 주제 자체가 요즘엔 트렌드가 돼서 신선하진 않다), ‘엑스페리먼트’는 ‘내 안의 악마성’을 메시지로 한다는 점에서 ‘악마를…’과 유사했다. ‘아저씨’는 멋진 대사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파괴력이 강한 새로운 액션을 보여주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딱히 없었다. ‘대한민국 아저씨 무시하면 피 본다’ 정도? ‘디센트2’는 ‘동굴 가지 마라, 얘들아’ 외엔 메시지 자체가 없는 영화였다.

최고의 어이상실=‘아저씨’에서 악당들 중 최고 실력을 가진 고수가 원빈과 맞서는 클라이맥스는 영 이해가 안 간다. 권총을 가진 악당이 칼을 든 원빈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한번 남자답게 대결해보자’며 권총을 내려놓고 일대일로 붙을 이유가 있을까. 괜히 대결했다가 원빈한테 죽음을 당할 것이 명약관화하거늘. 이런 공평무사의 정신이 있는 놈이라면 애당초 악당 자체가 안 되었을 터 아닌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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