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3부]<4>신데렐라-온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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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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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보다 시부모 능력 중요…유리구두 결혼? 그건 동화잖아요"

‘1950년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 채 혼례를 올렸다. 1970년대, 친척의 소개로 중매결혼했다. 1980년대, 캠퍼스 커플로 만나 가정을 이뤘다. 2000년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스펙’을 꼼꼼히 따져본 뒤 결혼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우자를 만나는 방식과 선택의 조건은 부(富)와 계층의 세습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배우자 간 사회경제적 조건이 비슷한 사회일수록 결혼을 통한 계층이동의 통로는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이었다. 배우자의 선택 범위는 사회적 신분 등 일정한 기준에 따라 미리부터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광복과 전쟁, 고도성장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개인주의와 남녀평등사상이 부상하고 당사자끼리의 연애혼을 통한 핵가족 체제가 정착되면서 결혼을 통한 계층이동 통로도 꽤 유연해졌다.

하지만 이제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다른 계층 간 결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계층적 유동성이 큰 ‘열린 구조’에서 미래의 삶의 수준이 예측 가능한 ‘닫힌 구조’로 다시 전환되고 있음을 결혼시장은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 결혼은 인생 최대의 비즈니스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남자친구가 가난한데 결혼해도 될까요’ 같은 하소연이 간혹 올라온다. ‘사랑한다면 결혼하라’는 대답보다 ‘결혼은 현실이니 다시 생각하라’는 인생선배들의 조언이 압도적으로 많다.

명문여대를 졸업한 뒤 법률회사에 다니는 A 씨(33). 그는 몇 달 전 결혼정보회사 커플매니저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남성의 학력은 전문대 이상이면 돼요. 그 부모님의 경제력이 더 중요해요. 남자가 착하고 집안 재력만 있다면 제가 그 집에서 현명한 며느리 할게요. 재테크도 자신 있어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박사 학위를 취득한 B 씨(30)가 꼽은 조건도 ‘무난한 집안 출신의 똑똑한 박사 신랑’보다는 ‘빌딩 갖고 있는 시부모나 중견기업 대표 시아버지’였다. 남자의 조건은 강남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30대 초반 여성회원의 어머니는 서울 강남 요지에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커플매니저에게 ‘개천에서 용 된’ 남성은 피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딸을 사랑하기보다는 재산을 보고 오는 것 아니겠어요.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이 성격도 좋습니다. 또 애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경우 양가에서 도와줄 수 있어야죠.”

한 결혼정보회사의 커플매니저는 “최근 들어 상대 남성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시부모와 결혼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배경에 집착하는 여성이 크게 늘었다”면서 “‘지금부터 벌어야 얼마나 벌겠나’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고 말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한국사회에서 안정된 자산을 가진 사람이 1등 신랑감, 신붓감으로 꼽힌다. ‘가난한 판검사보다는 돈 있는 월급쟁이가 낫다’는 경향이 뚜렷하다. 배우자의 ‘가능성’보다는 배우자와 집안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자산’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재능과 노력에 의한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그만큼 좁아진 탓이다. 여기다 요즘 결혼적령기 남녀가 어린 시절 외환위기를 겪고 사회진출기에 극심한 취업난을 겪은 ‘트라우마 세대’라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이처럼 ‘확실한 미래’에 대한 쏠림은 학벌 인플레 및 여성취업 활성화 현상과 연결돼 결혼연령을 늦추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외환위기 직후만 해도 해외의 전문직 출신, 해외 대학 학부 출신 등은 결혼시장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리 잡기 쉽지 않다는 리스크가 있다’는 이유로 예체능 출신과 함께 기피 대상으로 분류된다는 것이 결혼정보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 新카스트 시대

취재팀은 결혼정보업체 ‘선우’의 2003∼2004년 회원 6909명과 2009∼2010년(8월 17일 기준) 회원 6703명이 배우자를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을 비교 분석했다. 2004년에는 남성의 경우 △연봉 2500만 원 이하 △연봉 2500만∼3500만 원 △연봉 3500만 원 이상 모두 연봉 2500만 원 이하의 여성과 교제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2009∼2010년 남성회원들은 세 카테고리 모두 자신과 비슷한 연봉을 받는 여성과 교제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한국결혼문화연구소 황선영 연구원은 “요즘 남녀는 결혼을 안 하면 안 했지 눈높이를 낮추려 하지 않는다”면서 “결혼을 통해 계층상승은 못할지언정 하강은 않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형성된 결혼시장에는 ‘계급’이 분명히 존재한다. 출신 대학과 학위, 거주지, 직업이 계급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상위 5%를 위한 결혼정보회사’를 강조하는 한 업체는 홈페이지에서 ‘남성회원. 서울대 박사. 잠실 거주. 전임 교수/ 여성회원. 연세대 졸, 연희동 거주. 의상디자이너/ 남성회원, 연세대 박사. 압구정동 거주, 치과교정 전문의/ 여성회원. 서울대 약대 석사. 한남동 거주. 외국계 제약회사’를 강조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형남규 이사는 “특히 상류층일수록 끼리끼리 짝을 짓는 ‘동질혼’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상류층에는 결혼정보회사 외에 ‘마담뚜’ 역할을 해주는 이들이 있다. 은행 프라이빗뱅커(PB)나 ‘부자동네’ 은행 지점장들이다. 이들은 고객의 재무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신뢰도 높은 상대를 소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은 최근 커플매니저를 PB센터 직원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부유층들 사이에는 자녀에게 같은 계층의 배우자를 찾아주는 것이 자산관리만큼이나 중요하다”면서 “은행에서 주최하는 맞선은 고객들의 호응이 높다”고 말했다.

○ 낭만적 사랑을 찾아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끼리끼리 결혼하는 ‘동질혼’ 추세는 앞으로 더 굳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남녀 모두 높은 지위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배우자를 원하기 때문에 동질혼 움직임은 결혼시장에서 남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평형 상태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남녀가 만든 가정이 자녀의 출발선(지위 토대)을 결정하면서 사회의 계층화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특히 혼인이라는 것이 개인의 일일 뿐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는 정서가 여전히 깔려 있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말한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제론 스미츠 박사가 1998년 미국 사회학회지에 발표한 ‘65개국에서 조사한 학력 동질혼 연구’에 따르면, 사회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임금과 사회보장제도가 적정 수준에 이르러 안정된 생활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혼인이 증가하고 동질혼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됐다. 한국에서 이 전망이 맞을지는 불투명하다.

이웅진 선우 대표는 “어쨌거나 사회경제적 배경이 남녀의 사랑을 조건짓는 상황보다는 남녀의 사랑을 기초로 이뤄진 결혼이 사회경제적 디바이드를 유연화할 뿐 아니라 현대적 결혼관에도 어울리며 훨씬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후자가 인간의 예속을 줄이고 자유를 증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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