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영화 ‘킥 애스’를 관람한 어느 40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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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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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속 엽기 아빠와 딸을 보며
불현듯 현실속 나와 내딸 모습이…

영화 ‘킥 애스: 영웅의 탄생’에 등장하는 열한 살짜리 히트걸(왼쪽)은 조폭 아저씨들의 머리통을 쌍권총으로 날려 버릴 만큼 엽기적이다. 사진 제공 시너지
영화 ‘킥 애스: 영웅의 탄생’에 등장하는 열한 살짜리 히트걸(왼쪽)은 조폭 아저씨들의 머리통을 쌍권총으로 날려 버릴 만큼 엽기적이다. 사진 제공 시너지
국내 굴지의 유통기업 차장인 김모 씨(41)는 지난주 토요일 황당한 일을 겪었다. 금요일 밤 12시까지 야근을 한 만큼 휴일인 토요일을 맞아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즐기려 했던 김 씨. 그러나 이날 오전 9시부터 초등 5학년인 딸(11)이 미친 듯이 흔들어 깨우는 게 아닌가.

“아빠. 내 친구가 10시까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좀 나가줄래?”(딸)

“아빠가 좀 피곤한데…. 침실 문 걸어 잠그고 죽은 듯이 자고 있으면 안 될까?”(김 씨)

그러나 딸은 막무가내였다. 이유인즉, “아빠가 키도 작고 뚱뚱한 데다 눈도 작아서 친구에게 보여주기 창피하다”는 것. 부대찌개 전문점을 운영하는 친구의 아빠는 훤칠한 키에다 ‘완전 멋진’(딸의 표현)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니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멤버 민호만큼이나 큰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키 작고 뚱뚱하고 눈이 작은 것은 사실인지라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김 씨. 트레이닝복 하의에 누런 잠바를 걸쳐 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현관을 나섰다. 순간 거실에서 닌텐도 ‘위’를 하던 딸은 “아빠. 안녕!” 하며 김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했다.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전 하지 않던 인사를 하는 게 어디냔 말이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여보, 잠깐만!” 하고 아내가 불러 세웠다. 아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애들이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놀토(노는 토요일)가 아니면 만날 기회가 없잖아. 오전에 만나서 펠트 바느질놀이를 2시간쯤 하다가 걔들이 점심 사먹으러 나갈 거야. 애들 나가면 바로 문자할게. 그때 들어와” 하면서 가는 길에 분리해 버리라며 일주일간 모아놓은 재활용 쓰레기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만화가게로 갈까, 아님 찜질방에 갈까 고민하던 김 씨는 불현듯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걸어서 15분 거리의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전 10시 반 상영을 시작하는 ‘킥 애스’라는 영화의 표를 끊었다.

‘2시간 때우고 집에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김 씨.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 김 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범한 청소년이 슈퍼히어로가 되어 악당과 싸우는 영화’ 정도를 예상했건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히트 걸(Hit Girl)’이란 소녀 슈퍼히어로는 그야말로 ‘엽기적’이었던 것!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이 순진한 모습의 11세 소녀는 “부모님을 길에서 잃어버렸어요”라며 징징 울면서 적의 소굴로 침투한 뒤 조폭 아저씨 십수 명의 머리통을 쌍권총으로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히트 걸의 아버지인 ‘빅 대디’(니컬러스 케이지)였다. 올빼미 비슷하게 생긴 이 슈퍼히어로 아버지는 딸의 생일선물로 “어렵게 마련했다”며 최신형 잭나이프를 손에 쥐여주는가 하면, 딸이 장검을 휘두르며 악당들의 발목을 댕강댕강 날릴 때마다 “잘했어(Good job)! 우리 딸 정말 대견해”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김 씨는 문득 히트 걸이란 이 소녀가 자신의 딸과 동갑내기란 사실을 떠올리며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초딩(초등학생)들은 참 무섭구나’란 생각을 했다. 토요일 아침부터 아빠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딸이나 스크린 속 이 엽기소녀나, 다른 이가 받는 마음의 상처엔 무감(無感)하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스쳤다. 따지고 보니, 히트 걸의 아빠인 빅 대디나 김 씨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사회정의 구현’과 ‘복수’란 명분 아래 딸을 살인기계로 키워낸 빅 대디나 ‘경쟁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며 딸을 수학경시대회의 ‘문제풀이 머신’으로 키워가고 있는 김 씨나 무엇이 다르냔 말이다.

낮 12시 반, 영화가 끝났다. 김 씨는 극장을 나서며 휴대전화를 살펴보았지만 ‘이젠 귀가가 가능하다’는 아내의 문자메시지는 와 있지 않았다. 문득 억울한 마음 반, 화나는 마음 반이 된 김 씨는 다짜고짜 집으로 향했다. ‘못생겼든 뚱뚱하든, 그건 문제가 안 돼. 난 딸의 아빠야.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사실을 딸이 깨닫도록 해야 해’라고 결심한 김 씨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아이들이 있더라도 그냥 들어갈래.”(김 씨)

“아유, 당신 왜 그래? 잘 버텨놓고 막판에 소심하게…. 30분만 있으면 애들 올리브 떡볶이 사먹으러 나간단 말이야.”(아내)

김 씨는 다시 발길을 돌려 집 근처 안경점에 들어갔다. 사지도 않을 선글라스지만 당장이라도 살 것처럼 하면서 이것저것 수십 개를 써보았다. 20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드디어 아내로부터 ‘들어와도 됨’이라는 문자메시지가 당도했다. 혹시라도 아파트 입구에서 딸 일행과 마주칠까 두려웠던 김 씨는 5분간 선글라스 몇 개를 더 써본 뒤 귀가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위 내용은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가 필자에게 털어놓은 사연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는 극히 일부의 경우로, 40대 가장 모두가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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