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주제:실명과 익명 보도의 기준

입력 2008-03-22 03:00수정 2009-09-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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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독자인권위원회 윤영철 위원, 김일수 위원장, 양우진 황도수 위원(왼쪽부터)이 20일 본사 회의실에서 ‘실명과 익명 보도의 기준’을 주제로 토론했다. 홍진환 기자
《‘6공 실세 P 씨’ ‘유명 여자 탤런트 A 씨’ ‘유명 프로야구 선수였던 L 씨’ 등. 최근 각종 사건 보도에서 이런 식의 익명이 나갈 때면 어김없이 본사 독자서비스센터에 전화가 걸려온다. 다른 신문이나 인터넷이 실명을 공개했음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독자의 알 권리 침해”라든가 “신문이 재미없다”고 항의하는 내용이다.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20일 익명에 의한 개인의 인격권 보호와 공공의 이익 추구를 위한 실명 공개라는 상호 충돌하는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를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김일수(고려대 법대 교수) 위원장과 양우진(영상의학과 전문의) 윤영철(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 황도수(변호사) 위원이 참석했다.》

사회=황유성 독자서비스센터장

고소 고발 단계선 익명보도 지켜야

―실명 보도와 익명 보도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황도수 위원=인터넷 공간에 이미 실명이 등장했는데도 신문이 ‘국회의원 P, L 씨’ 식으로 보도하면 독자가 궁금해하게 마련입니다. 실명 보도와 익명 보도의 원칙과 기준은 얼마나 공공성을 띤 인물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판례는 범죄 사실에 대한 보도는 공공성을 인정하지만 범죄자 개인에 대한 보도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소 고발, 수사, 기소, 재판, 판결 확정 등 단계에 따라 보도 기준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김일수 위원장=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고소 고발 단계에서는 익명 보도가 정당합니다. 수사나 기소 단계에서 실명으로 보도한다면 선입견을 갖게 해 법관에게 유죄의 심증을 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범죄가 확정되면 진실한 사실로 공공성이 높아지므로 실명을 공개해도 위법하지 않겠지요.

▽양우진 위원=미성년자 성 범죄의 경우 수사 단계는 물론 재판이 완료될 때까지 실명 보도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사 피해 예방이라는 공익을 위해 확정 판결이 나면 실명을 공개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성범죄자의 거주지에 팻말을 세우고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하면 부모에게 알려주는 장치까지 두고 있습니다.

▽윤영철 위원=어떤 성격의 범죄인지, 어떤 단계에 있는지, 범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공익과 인권의 충돌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익명 보도를 남발하면 언론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또 비슷한 사건인데도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인물은 익명으로 처리하고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등은 실명을 밝혀 호기심을 자극하는 등 이중 기준을 적용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익명 보도를 하다 사건의 실체에 따라 실명을 밝혀야 할 상황이 된다면 전환 시점을 어떻게 잡는 것이 좋을까요.

▽황 위원=다른 신문이나 인터넷이 실명을 밝혀 이미 공개됐으니 뒤따라 실명을 쓴다고 해서 면책되지는 않습니다. 순서에 관계없이 실명을 밝힌 모든 언론사를 상대로 엄청난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던 사례가 적지 않거든요.

▽김 위원장=일회성 보도로 끝나지 않고 감춰진 사건으로 단서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진실성이 담보되고 관심이 큰 내용이라면 고민이 필요합니다. 사건 초기에는 익명으로 접근하다가 내용이 점차 밝혀지면서 진실성의 실체가 형성되고 공공성이 높아지면 실명을 보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성과 공공성, 사적 비밀과 인격권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이므로 단계별로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사 단계에서는 매우 조심하고, 재판 단계에서는 좀 더 진전시켜 나가며, 확정 단계에서는 더욱 폭넓은 자유를 언론이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윤 위원=살인처럼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면 범인은 익명으로 가도 알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중요해 인물에 초점을 맞춰야 할 사안이라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확보되는 시점에 과감하게 익명을 탈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언론이 익명보도를 남용하는 것은 소송을 피하고 안전하게 가자는 심리도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자가 치열한 사실 확인을 통해 진실을 확신한다면 익명으로 보도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양 위원=범죄자에게 마스크를 씌워 얼굴을 감춘 사진을 신문이 싣는다면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얼굴 모양과 옷차림만 봐도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보다는 주변 사람이 알아보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니 결과적으로 실명을 밝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김 위원장=명예훼손의 경우 분명히 진실을 말하는데도 소송에 걸려 기자나 언론사가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있습니다. 권력의 비리를 추적하고 사회의 구조적 비리를 들춰내야 할 기자들이 ‘혹시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앞세운다면 사회 발전 차원에서도 큰 딜레마가 아닐까요. 포기하며 덮어버리지 않고 진실을 추구하는 용기를 가지자면 피해를 예방할 지혜와 장치가 요구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언론사 차원의 보험도 고려해 보면 어떨까요.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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