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

  • 입력 2008년 2월 14일 02시 58분


설날 아침 암자에 계시는 노스님을 찾아뵈러 가는 길에 산언덕에 앉아 울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작년의 그였다. 아들이 죽어, 나와 함께 이 산언덕에서 아들의 유해를 뿌리며 울던 아버지였다. 아들의 뼈를 조밥에 섞으며 그가 울 때 나 역시 ‘무상게’를 외며 울었다. 염불을 하다 멈추고 또 하다 멈추고 슬픔은 그에게도 내게도 그렇게 눈물을 남겼다. 산에 훠이훠이 뼛가루를 조밥에 말아 뿌리며 짧은 생애의 슬픔이 멀리 날아가기를 빌었다. 새가 아이의 유해를 물고 멀리 날아가 이 이생의 기억을 지우기를 나는 그 순간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정작 그 무엇도 지우지 못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죽은 아들은 이 산언덕에서의 기억을 잊고 지금쯤 그 어디엔가 다시 태어났을 텐데 그의 아버지는 이 산언덕에서 목이 메는 초혼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울어도 볼 수 없고 눈물로도 그릴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며 아버지는 눈물로 설 아침을 맞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란 무엇인가. 그 인연이 얼마나 크기에 그는 눈물로 설 아침을 맞고 있는 것인가. 그의 눈물을 보며 나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나 죽는다는 순리만으로는 자식을 잃은 슬픔은 치유될 수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무상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왜 이리도 슬픔에 목이 메어야 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은 다만 형상의 거울에만 있을 뿐 마음의 빈 거울에는 원래 없는 것을 우리는 무엇을 일러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가.

세상에는 치유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 가슴에 자식을 묻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살아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는 설이 되면 이 자리에 와서 오늘처럼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버지라는 인연으로 그는 평생을 눈물 흘리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지중한 인연에 앞서는 진리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아버지의 눈물은 무상한 삶의 진리마저도 지우며 평생을 흐를 것만 같다.

나는 산길을 오르며 읊조렸다. 나지 마라 죽기 어렵나니, 죽지 마라 태어나기 어렵나니. 인연이 그치면 눈물도 다하리니. 인연이 다하는 날이 그 언제일는지. 겨울 햇살이 눈물처럼 내 발길에 내렸다.

성전 스님 남해 용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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