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김곰치]을숙도에 살어리랏다

  • 입력 2006년 8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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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란 말이 붙은 도서관 열람실이 생각났다. 낙동강 하구 을숙도(乙淑島). 너른 하늘, 너른 들이 잔잔하다. 새들이 갈대숲 안에서 숙(淑)하고 있는 곳. “원색 옷을 피하고 자연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는다.” “(방문객들은) 큰 소리를 내거나 뛰어다니지 않는다.” 시민단체 ‘습지와 새들의 친구’가 안내 팸플릿에 적어 놓은 이런 글도 그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왜가리와 쇠제비갈매기를 보았다. 왜가리와 쇠제비갈매기라고 ‘습지와 새들의 친구’ 박중록 선생이 옆에서 가르쳐 줘서 알았다. 열애 중인 참게 암수를 보았다. 또 백조를 보았고, 산비둘기를 보았다.

탐조(探鳥·bird watching)도 낚시와 사냥만큼 스릴이 있다. 육안으로 새의 위치를 확인하고도 렌즈에 눈을 대고는 한참 다시 찾아야 한다. 새를 눈에 들이고 초점을 맞춘다. 이 순간이 가장 설렌다. 고성능 망원경 안에서 흐릿한 자태가 한순간 선명해질 때,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새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눈으로 핥는 듯한 감각의 만족이 있다. 계기만 있으면 담배처럼 딱 끊을 수 있다는 낚시와 사냥은 애초에 이런 탐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눈에 낙동강 하구를 다 볼 수 있는 다대성당의 전망대보다 내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곳은 명지갯벌이다. “을숙도의 풍치에 반했다가 이곳에 와 보고 전혀 다른 분위기, 고즈넉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박 선생이 10여 년 전의 감동을 회고했다.

물은 날씨만큼 흐려 있다. 경계를 지어 말하자면, 태백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이다. “샴푸 하나 바꿨을 뿐인데!” 하는 광고 카피를 변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흐르기만 했을 뿐이야!”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부지런히 흘러왔을 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온갖 조화를 부렸다. 한 가지의 나쁜 짓과 1만 가지의 선한 일을 하고 바다에 이르렀다. 강은 완전히 빨려 들어가 다른 강이 되고 다른 바다가 되고 있었다. 그 최후의 자리에서도 배고픈 새들을 먹이고 있었다.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고 어찌 이리 고요하냐. 하나의 물이 또 하나의 물이 되는 일, 밤이 아침 되듯이 하구에서는 아주 느리게 ‘완전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몇 년 전 영화 ‘위대한 비상’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새를 사냥하는 인간의 총소리가 너무 커서, 이 아름다운 것을 그날 오직 나 혼자만 보고 있어서. 지구라는 구슬을 소행성이라는 구슬로 맞혀 버리려다가 변함없이 날고 있는 죄 없는 새들이 눈에 밟혀 재앙의 하느님은 손가락을 몇 번이나 거두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새들의 평화로운 보금자리, 이 을숙도를 횡단하려는 명지대교는 정말 필요한 다리일까. 밤낮없이 소음과 불빛을 쏟아 내고 독가스를 뿜으며 자동차를 신나게 타고 다닐 권리가 인간에게는 있지 않다. 나는 것 자체가 기도의 동작인 존재들, 아기처럼 순수한 새들이다.

람사르협약(물새 서식처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보전을 위한 협약) 사무국의 피터 브리지워터 사무총장이 얼마 전 을숙도를 찾았다. 2008년 람사르총회 개최를 협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낙동강 하구부터 들른 것이다. 그는 을숙도 인근이 람사르협약이 주목하는 습지일 정도로 빼어나고 훌륭하다고 연방 찬탄했단다. 낙동강 하구를 지키려는 세계인들의 의지를 기대해보고 싶다. 을숙도에서 새들이 평화롭게 깃을 칠 때, 을숙도에 와서 인간이 고요를 배울 때, 신은 인간을 언제나 용서한다.

김곰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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