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한 대학]<17>독일 바우하우스大

입력 2006-05-22 02:59수정 2009-10-08 09:26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는 학생 주도의 프로젝트 참여형 교육을 통해 20세기 초 디자인계에 혁신을 일으켰던 바우하우스의 전통과 명예를 되살리고 있다. 토목학부 학생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디자인한 ‘하이델베르크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위)와 디자인학부 학생의 한 작품. 사진 제공 바우하우스대
바이마르 기차역에서 시내 중앙을 통과해 바우하우스대로 향하는 동안, 광장과 거리에 서있는 수많은 문인과 사상가들의 동상이 내내 시선을 붙잡았다. 괴테, 실러, 헤르더…. 바흐에서 리스트, 바그너로 이어지는 작곡가와 니체,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철학자들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1999년 ‘유럽의 문화수도’로 선정됐을 때 신문들이 ‘이제야 바이마르다’라는 제목을 달았을 정도로 인구 6만여 명에 불과한 이 도시는 독일의 문화수도로 자부심을 지녀왔다.

그러나 건축과 디자인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도시는 무엇보다도 현대 조형예술의 산실로 불리는 ‘바우하우스’란 이름이 먼저 다가오는 명소(名所)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는 1919년 이 도시에서 ‘집짓기’를 뜻하는 종합예술학교 겸 작업소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건축과 디자인을 주축으로 산업과 예술을 결합시킨 기능적 미학을 추구했고, 이 같은 이념은 당대의 미의식에 폭풍 같은 혁신을 몰고 왔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등도 이 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우리의 전통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전통만 갖고 살아남을 수는 없죠.”

게르트 치머만 총장은 아직도 그로피우스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로피우스 방’으로 기자를 안내하며 프로젝트 위주로 진행되는 창의적인 교육방식이 바우하우스대의 새로운 방식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교수가 내주는 과제에 학생이 응하는 방식의 ‘강의’는 우리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건축 토목 디자인 미디어 등 4개 학부마다 20여 개에 이르는 프로젝트에 5000여 명의 재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획을 주도합니다. 이런 프로젝트에서 발휘한 성과가 쌓여 종합적인 평가가 이뤄지죠. 다른 어떤 학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육형태입니다.”

그는 두툼한 학교연감을 내밀었다. 재즈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팸플릿 디자인, 하이델베르크 중심가의 재개발 시안, 첨단 손목시계 디자인…. 조형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프로젝트가 담겨 있었다. 창밖에는 카메라와 마이크로 인터뷰 작업을 진행 중인 미디어학부 학생들과 노천에서 땀을 흘리며 모형작업에 열중하는 건축학부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1차대전 직후의 폐허에서 디자인을 ‘생산을 위한 원형의 창조’로 정의하며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바우하우스. 1925년 생산과 디자인의 더욱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 공업도시 데사우로 이전했다. 그러나 데사우에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나치의 압력 때문에 1932년 베를린으로 다시 이전했고, 이듬해 나치가 집권하자 이마저 문을 닫아야 했다.

60여 년이 흐른 1996년, 옛 바우하우스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던 ‘바이마르 건축대학’은 마침내 4개 학부를 둔 바우하우스대로 새 출발을 했다. 왜 ‘바우하우스’의 이름은 그토록 오래 단절되어야 했을까.

“아이러니입니다. 나치는 바우하우스가 ‘빨갱이’ 기관이라고 단죄했었죠.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동독 정권은 소비에트의 교조적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어긋나는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통일 이후 6년이 흘러서야 ‘바우하우스’의 기치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거죠.”

잃은 시간이 많은 만큼 나태함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론과 실기가 결합된 탄탄한 프로젝트 수업을 바탕으로 이 학교는 각종 공모전 참여를 최대한 장려하고 있다. 그 결과 학교 웹사이트 ‘최신 뉴스’ 코너에는 수상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치머만 총장은 “방금도 최고 권위의 디지털콘텐츠상인 ‘아니미츠상’에서 우리 학생이 우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각종 공모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학교의 유명세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5000여 명의 학생들은 언제나 ‘뭔가 희한한 일’을 만들어내며 뉴스를 타고 있다. 최근에는 베른트 호헨게르트너라는 미디어학부 학생이 밀밭에 트랙터로 초대형 바코드를 만드는 ‘안녕, 세계야(Hello, World)’ 프로젝트를 진행해 유럽 전역의 화제를 모았다. 위성사진 프로그램 ‘구글 어스’를 미디어의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8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바우하우스대의 핵심이념은 ‘예술과 산업의 결합’입니다. 그러나 표현 환경은 달라졌습니다. 최첨단 건축소재와 개인휴대정보단말기(PDA), 포드캐스팅(PodCasting·MP3 플레이어를 이용한 방송)을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구동독이었던 튀링겐 주정부와 협의해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자인학부 재학생인 크리스티안 테슈 씨에게 모교의 매력을 물어보았다. 그는 “자유로운 프로젝트 참여형 교육이 가장 큰 매력”이라며 건축학부 학생이 디자인학부의, 디자인학부 학생이 미디어학부의 프로젝트에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미 재학생의 15%는 외국인입니다. 미국 버지니아기술대(TUV), 시카고 IIT,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일본 와세다대 등과의 교류도 활발합니다.”

치머만 총장도 한국의 연세대, 경희대 등과의 협력도 결실 단계에 와 있다며 “재능이 풍부하기로 이름난 한국인이 우리 학교에서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프란츠 리스트 음대

문화도시 빛내는 자매대학 “최고의 오케스트라 양성소”

‘문화도시 바이마르의 사이좋은 자매.’

바이마르 시당국과 시민들은 이 도시에 자리 잡은 두 대학을 이같이 부른다. 두 학교란 바우하우스대와 프란츠 리스트 음악대학이다.

바이마르 시는 1996년 바이마르 건축대학이 바우하우스대로 승격되면서 “우리도 이제 대학도시”라 선언했다.

대학도시를 향한 전략에는 바우하우스대와 함께 독일 최고(最古)·최고(最高)의 오케스트라 단원 양성소로 이름을 떨쳐온 프란츠 리스트 음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리스트는 1872년 제자인 카를 뮐러하르퉁을 통해 바이마르에 독일 최초의 오케스트라 학교를 세웠다. 2차대전 후 종합 음대로 승격된 이 학교는 1956년부터 설립자인 리스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됐다.

이 학교와 바우하우스대는 수많은 공동 프로젝트 및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 음대와 바우하우스대 미디어학부가 공동으로 설립한 전자음악 스튜디오가 대표적인 예.

특히 미디어학부 학생들은 프란츠 리스트 음대의 학생들이 제작한 음향 자료를 프로젝트에 반영해 서로의 활동에 큰 이득이 되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 음대는 지난해부터 경기 용인의 강남대와 ‘강남대 독일 바이마르 음악학부’를 공동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용인에서 3년, 독일에서 1년의 학업을 마치면 공동학위가 인정된다.

바이마르=유윤종 특파원 gustav@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