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정찬주]돌담에 깃든 相生의 지혜

  • 입력 2005년 11월 17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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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리가 내리고 난 뒤부터 파초 잎이 하루가 다르게 시들시들하다. 하늘 끝까지라도 자랄 것 같더니 이제 그 기세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파초는 사라지지 않을 터이다. 내년 봄의 성장을 기약하며 잠시 휴식에 들어갈 뿐이다. 선가에 이런 말이 있다.

‘봄바람과 여름철의 비는 만물을 생장하게 만든다. 가을 서리와 겨울의 눈은 다시 만물을 성숙하게 한다.’

우리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자연의 섭리로 본다면 혹독한 시련은 성숙으로 가는 과정인 것이다.

최근에 마친 두 가지의 일은 무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끝을 보았다. 하나는 김장 배추의 허리를 지푸라기로 싸매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담 쌓는 일이었다. 배추는 초가을에 모종 100여 포기를 심어 잘 키우고 있는 중이고, 김장 무도 한 두둑을 심었는데 달기가 그만이다. 녀석들의 매력은 기온이 점점 내려가는데도 기가 꺾이지 않고 더 파래지는 것이다. 그러나 농작물은 눈을 즐겁게 하는 화초가 아니다. 겉만 번지르르하다 보면 속이 부실해지고 만다. 어찌 인간사와 같은지 혼자서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무는 적당히 솎아 주어야 하고, 배추는 제때 겉잎을 싸매 주지 않고 내버려 두면 속이 차지 않는다.

돌담 쌓는 일은 작심하고 벼른 일이었다. 이 산중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처소 앞으로 난 길이 오솔길이었으므로 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최근에 승용차가 다닐 수 있도록 3m 너비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난 것이다. 돌들은 쑥고개 공사현장에서 아는 분이 처분할 곳을 찾다가 무상으로 실어다 준 것이다.

담 쌓는 일은 마을의 농부 한 분과 나, 그리고 아주머니 두 분이서 근 일주일 동안 했다. 모두가 초보였으므로 처음에는 막막했다. 돌무더기에 있는 돌들은 벽돌처럼 면이 쌓기 좋아야 할 텐데 하나같이 축구공처럼 둥글둥글했다. 그러나 돌을 쌓아 가면서 요령이 저절로 터득됐다. 돌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반반한 면이 나왔고, 들었다 놓았다 세 번 정도 하면 돌이 찾아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네모나고 반반한 돌만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했지만 차츰 크고 작고 둥글고 네모난 돌들이 서로 맞물려 담이 견고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배울 만한 지혜는 돌담에도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지연, 학연, 나이, 생각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려는 속물근성이 있지만 돌들은 담이 돼 가는 과정에서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더불어 한 덩어리를 이루는 상생과 공존을 보여 주었다.

방금도 쌓아 놓은 돌담을 보고 왔지만 많이 비뚤어진 부분은 비가 오려고 해서 마음이 급했거나 방심한 채 쌓았고, 보기 좋은 부분은 마음이 유쾌하고 편했던 순간에 쌓았던 곳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마음까지 새겨진 돌담은 한동안 명상과 사색거리가 될 것 같다.

돌 쌓기를 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과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다쳐 꼬무락거리기조차 자못 불편하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던 열 개의 손가락이 새삼스럽게 고맙고 커 보인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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