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생애 첫 만화전시회 갖은 신문수화백

  • 입력 2004년 10월 26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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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전시회장에서 만난 신문수 화백은 잘 보존된 30, 40년 전 자신의 만화책을 들고 와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을 볼 때 새삼 보람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뒤편의 캐릭터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로봇 찌빠’의 모습. 어수룩하고 욕심 많은 ‘팔팔이’가 ‘찌빠’의 등에 올라 타 있다.-안철민기자
만화전시회장에서 만난 신문수 화백은 잘 보존된 30, 40년 전 자신의 만화책을 들고 와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을 볼 때 새삼 보람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뒤편의 캐릭터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로봇 찌빠’의 모습. 어수룩하고 욕심 많은 ‘팔팔이’가 ‘찌빠’의 등에 올라 타 있다.-안철민기자
이백서른여덟 가지 귀신의 수염과 머리털을 뽑아 만들었다는 ‘도깨비감투’. 그걸 쓰고 투명인간이 돼 집에 침입한 도둑을 때려잡는 개구쟁이 혁이(1974년 도깨비감투).

미국의 어느 로봇회사에서 제작됐으나 두뇌 결함으로 자꾸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로봇 찌빠’는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상고머리, 돼지 코, 깡통 몸통, 용수철 팔다리 등이 트레이드마크(1979년 로봇 찌빠).

30, 40대가 넘은 사람들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요, 연상이 가는 모습일 것이다. ‘한국 아동만화의 산 역사’, ‘한국 명랑만화의 대부’, ‘한국 명랑만화의 원조’ 등으로 불리는 신문수(申文壽·65) 화백의 대표작들이다.

40여 년간 만화그리기 외길을 걸어온 신 화백이 최근 만화전시회를 열었다. 강산이 몇 번 변하고도 남을 만큼 오랜 세월동안 작품 활동을 해 왔지만 전시회를 갖는 건 이번이 처음.

자신의 만화 주인공처럼 편안하고 온화한 인상의 신 화백은 “여간 부끄럽고 떨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말한다. 18일부터 닷새간 서울 강남의 문화콘텐츠센터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28일부터는 경기 이천의 청강만화역사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내년 4월까지 자신의 40년 만화세계를 보여주는 장기 전시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나이지만 그는 요즘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각종 신문과 잡지, 대기업 사보 등 모두 8군데에 고정적으로 만화를 그리고 있다. 외환위기 전에는 무려 31군데에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를 걱정하는 주변의 만류로 작품수를 줄였다.

“요즘은 예전만큼 만화 수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만화를 원하는 곳이 있는 한 계속 그릴 생각입니다. 집에서 쉬기에는 제가 너무 젊지 않나요.”

그는 이른바 ‘만화영재’는 아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지만 장래 희망에 만화가는 들어 있지 않았고, 만화가가 될 줄도 몰랐다는 것.

만화와의 끈끈한 인연은 엉뚱하게도 취업난에서 비롯됐다. “군대를 제대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체중이 적고 너무 야위었다고 취직이 안 됐어요. 할 수 없이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1963년 동아일보에 독자투고로 만화를 보냈는데 채택됐습니다. 신문에 인쇄된 내 만화를 보니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고바우 선생’을 연재하고 있던 김성환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해줬다. 소방차가 출동하다가 사이렌이 고장 나자 소방관이 ‘앵∼’ 하고 우는 아이를 안고 화재현장으로 달려가는 내용의 그의 만화를 보고 김성환 선생이 “아동만화로 나아갈 유망한 젊은이”이라고 칭찬한 게 직업 만화가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 뒤 1964년 한 잡지에 만화를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신의 만화작품을 보고는 “바로 이 길이구나”라고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만화의 매력에 푹 빠지면서 만화 그리는 것 이외에는 한눈 한번 팔지 않았다.

요즘 그의 작품에는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아졌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등 3대가 작품에 등장해 갖가지 생활상을 통해 세대차이도 표출하고, 그러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깨달아가는 식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가족관은 탈권위주의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가족의 질서는 위엄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며 아버지와 자식은 친구처럼 지내는 게 더 낫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그 스스로도 자식(4녀)에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해 왔단다.

“명랑만화는 어린이들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 게임, TV 등에서 자극적인 놀이문화가 범람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권장할만한 만화가 점차 사라져 가는 듯해 아쉽습니다. 만화가 21세기 ‘문화산업’만 지향할 게 아니라, 1960∼70년대 어린이잡지 전성기 때처럼 건전한 읽을거리로 어린이들에게 다시 널리 사랑받게 됐으면 합니다.”

▼신문수 화백은…▼

△1939년 충남 천안 출생 △1959년 서울 충암고 졸업 △1964년 잡지 ‘로맨스’에 명랑만화 ‘너구리 형제’로 데뷔 △1975년 명랑만화 ‘도깨비감투’로 잡지 ‘어깨동무’가 주는 최고인기작품상 수상 △1977년 한국창작만화가협회 회장 △1996년 명랑만화 ‘허풍이 세계여행’으로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출판상 수상 △2001년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공로상 수상 △2002년∼현재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부인 김정자씨(60)와의 사이에 4녀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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