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2004과학기술인]<8>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

  • 입력 2004년 5월 30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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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과 정부부처 수장의 역할을 할 때 수학과 물리학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털어놓는 진대제 장관.-김훈기기자
기업 경영과 정부부처 수장의 역할을 할 때 수학과 물리학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털어놓는 진대제 장관.-김훈기기자
“수학과 물리학이 기본입니다.”

과학을 잘 하려면 어떤 과목이 중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선배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답변이다.

그런데 기업을 경영하고 국가 정책을 수립할 때도 ‘수학과 물리학이 기본’이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42)이다.

“삼성전자 시절부터 정보기술(IT) 장관직을 수행하는 지금까지 분석적인 태도와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수학과 물리학이었어요. 합리적인 판단을 했으니 누구 못지않은 ‘화끈한 결단력’도 나올 수 있었죠.”

진 장관의 별명은 ‘미스터 칩’ ‘미스터 디지털’이다. 삼성전자 시절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128메가 D램, 1기가 D램을 잇달아 개발해 컴퓨터의 기억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반도체 신화’를 창조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IT 산업의 핵심장비인 반도체가 그의 주전공.

“사실 반도체와 가장 연관이 깊은 분야가 수학과 물리학이에요.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할 때 한 선배로부터 이 말을 듣고 무조건 그 기초가 되는 미적분학 원서를 구입해 남보다 먼저 열심히 공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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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는 아예 수학과와 물리학과에 원정을 가 응용수학과 응용물리 수업을 들었다.

‘커피잔과 도넛은 위상수학적으로 같다. 이를 증명하라.’

고도의 추상적 논리와 창의력이 요구되는 이런 문제들이 대부분이어서 본과 학생들도 골치아파했다. 물론 진 장관도 힘들었지만 난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고, 결과는 항상 A+였다.

이렇게 기초를 탄탄히 쌓은 덕에 남들이 못 푸는 문제를 향해 늘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가 대표적인 사례. 당시에는 반도체 회로의 선폭을 머리카락 두께인 1마이크로미터 이하로는 만들지 못했다. 반도체의 성분인 실리콘이 산소와 반응하면 ‘새의 부리’ 모양으로 산화막이 만들어지면서 부피가 커졌기 때문이다. 진 장관은 이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매달렸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생소한 주제여서 다른 분야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듣는 게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넘게 관련 학과를 샅샅이 뒤지며 발품을 팔았다. 공기역학을 다루는 항공과, 물의 흐름을 연구하는 기계과 등을 돌아다니며 물리현상의 원인을 찾았고 이웃 버클리대까지 뛰어가 컴퓨터계산 전문가에게 모델링기법을 익혔다. 결과는 성공.

이렇게 기초를 중시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닌 동력은 의외로 ‘지고는 못 사는 천성’ 때문이라며 웃는다.

“중학교 시절 친구와 탁구 경기를 해서 지면 그날은 잠을 못자요. 밤새 벽에 대고 탁구공을 치며 연습했거든요. 다음날 친구에게 이겨야 직성이 풀렸죠.”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제품이 쏟아지는 세계 IT 시장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일도 그에게는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경쟁이다. 대신 직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진 장관의 취임 초 정보통신부는 갑자기 파워포인트 이용법을 배우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문서보고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장시간의 토론이 이어진다. 이런 변화 덕분에 2003년 정부업무평가와 혁신평가에서 우수부처로 선정됐다.

“남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작업이에요. 하지만 노력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최근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일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은 자신의 길을 들려주고 싶어한다. 과학의 길이 당장은 험난해도 미래에는 다른 어떤 분야를 택한 것보다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대제 장관은▼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톰, 철인28호 등 로봇 만화를 보고 모형 배의 모터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까지 성적이 늘 ‘수’였다. 이런 미적 감각이 반도체를 입체적으로 설계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19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83년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HP, IBM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1985년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은 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디지털미디어총괄 대표이사 사장으로 활동했할 때까지 숱한 ‘반도체 신화’를 일궈냈다. 2003년 2월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취임.

▼청소년에게 한마디▼

청소년은 ‘가공하지 않은 웨이퍼’다. 마음껏 그림을 그려넣어 자신만의 새로운 반도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눈높이를 최대한 높여서 인생을 설계하라.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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