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범죄의 재구성’을 보고

  • 입력 2004년 4월 29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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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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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상담을 하면서 당혹스러운 순간은 처음 진료실을 찾아온 환자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뒤 “이제 저를 좀 분석해 보세요”라고 말할 때다. 상영 중인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백윤식)의 말처럼 “청진기 갖다대면 진단이 딱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편적인 몇몇 단서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거나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범죄의 재구성’에서 직업의식 투철한 사기꾼 최창혁(박신양)과 서인경(염정아)은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며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면 게임은 끝”이라고 말한다. 사기는 논리적 추론을 거친 일종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성공했지만, 사기계의 대부였던 김선생은 최창혁의 속마음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정신과 상담 역시 환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이 설명하는 ‘사기술’의 원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사기가 상대의 탐욕과 탐식의 틈새를 노린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목표물에 침투하는 액션 플랜의 과학이라면, 정신치료란 듣기의 과학이다. 비단 정신치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는 일은 모두 잘 듣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전달하거나 구체적인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까지는 우선 그보다 더 길고 복잡한 듣기의 과정이 필요하다.

수동적으로 팔짱 끼고 앉아 상대의 말을 청취하는 것으로는 상대의 진심을 이해하기 어렵다. 듣는다는 게 말로는 쉬워 보여도 일상의 대화에서조차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누구나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으로 재해석해서 듣기가 쉽고, 듣기보다는 내 생각을 먼저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잘 듣는 것은 우선 그 의미와 행간을 생각하며 공감적인 태도로 듣는 것이며,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지 않는 표정과 몸짓의 언어 역시 잘 듣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들어도 듣는 이의 경험과 태도, 자기 성찰의 정도에 따라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달라진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이 최창혁의 속마음을 읽는 데 실패한 이유는 그의 말을 듣기 이전에 4년 전의 실패로부터 재기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욕망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최창혁이 하필이면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더 자세히 물었어야 했고, 지나치게 명쾌하고 친밀한 태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언어에 귀 기울였어야 했던 것이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상대의 속마음에 대해 쉽게 얻은 결론은, 대부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 결과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투사한 것일 때가 많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대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국은행의 금고 속보다 적어도 백만배는 더 복잡하다. 거기에 조심해서 다가가지 않으면 이해에 실패할 뿐 아니라 자칫 그 마음을 다칠 수도 있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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