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나무]<12>신인령 이화여대 총장

입력 2003-06-30 18:34수정 2009-10-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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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가들을 길러낸 사회교육자에서 노동법 전문학자로, 현실 참여적 학자에서 대학 총장으로 자신의 길을 확장해 가면서도 현실과 학문 사이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살아온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60). 중고교 사회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대학의 총장으로서 민족에게 봉사하며 소외받는 이웃에게 헌신하는 여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실천’에 전념하고 있다.》

▼6·3 사태 ▼

대학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신인령은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며 법조인을 꿈꾸는 가난한 모범생이었다. 농촌봉사활동도 열심히 했고 조국산천을 지킨다며 송충이를 잡는 동아리에도 참여했던 순수한 여대생이었다.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은 “여성지성인들이 지성인으로서의 보편적 책임과 여성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이중부담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더 많은 도덕적 긴장감과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변영욱기자

당시 유일한 여성 법조인으로서 이화여대 법대 학장직에 초빙된 이태영 교수(1914∼1998)는 성실하고 총명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여성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10여명의 여성 인사들이 만든 ‘황윤석 판사 기념 장학금’을 주면서 신인령이 법학 공부와 사법시험 준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그러나 1964년 6·3사태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신인령은 법대 학생회장으로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앞장섰고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자기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밝고 정의로운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하던 법학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격적 삶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배자로 1년을 보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이때 다다른 결론은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출세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문학소녀 시절에 좋아했던 공초 오상순(1894∼1963)의 무소유적 삶은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보니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졸업장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태영 교수가 은신처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복학을 권했다. “사법시험은 안 봐도 좋으니 졸업만은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스승의 뜻을 따랐다.

대부분의 수배 학생들을 제적했던 다른 학교와 달리 이태영 윤후정 등 이화여대의 교수들은 학생들을 보호해 줬다. 졸업 후 신인령은 은사들의 관심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져서 2차 시험을 보는 도중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

대학 2학년 때 처음 만나 그를 기독교인으로 이끌어 준 강원용 목사(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는 규칙적 생활이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자료실에 출근할 것을 권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기관’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의 지원을 받으며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며 늘 약봉지를 들고 다니던 그는 사회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건강을 회복했다. 진심으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할 때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한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모여 1년 이상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빈부, 세대, 남녀, 이데올로기, 종교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양극화를 해소하고 민주화 인간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에서 창조적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간매개집단으로 자율적 민간단체가 육성돼야 한다는 방안이 제시됐다. 프로그램은 여성 노동 농민 학생 교회 등의 부문으로 나눠졌고 노동법을 전공한 신인령은 노동 분야를 맡았다.

4박5일 동안 강사로 참가한 전문가와 교육참여자가 함께 먹고 자고 청소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며 동등하게 생활하는 가운데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다같이 변화를 겪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됐다”고 말하는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일생 중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로 기억한다.

“최상의 윤리적 규범은 사랑의 법”이고 “자기실현의 극치는 대인관계에서의 자기포기 또는 자기희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강조했던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정신은 이 시기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가르침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줬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각 부문의 전문지식과 함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심어 주는 수준이었지만 교육을 받고 나간 사람들은 노조를 건설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를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당시 독재정권은 1979년 신인령을 비롯해 한명숙(환경부장관), 김세균(서울대 교수) 등 크리스챤 아카데미 회원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교육은 합법적인 수준이었다. 프로그램 내에서는 교육 참여자들에게 노조결성이나 민주화운동을 권유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참가자들이 스스로 깨달았을 뿐이었다. 때맞춰 10·26사건이 일어났고 신인령은 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학자와 운동가 ▼

다시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을 재개하려 했지만 곧 닥친 5·17로 교육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대학원에 들어가 노동법을 계속 공부했고 1985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 이화여대 교수로 임용됐다. 학생 시절부터 그를 믿고 아끼던 정의숙 총장이 독재정권 하에서도 그를 교수로 채용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회운동가가 아닌 ‘사회교육가’로 규정한다. 감옥에서 고문에 항복했던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사회운동 대신에 학문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그는 “학자와 사회운동가는 ‘소신’과 ‘신념’에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구체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길이 갈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두 길의 차이점은 희생과 고달픔의 정도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운동가는 더 고달프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보람은 있지만 물질적 보상이 없다. 이에 비해 학자에게는 노력에 상응하는 유무형의 보상이 주어진다. 이로 인해 학자는 도덕적 긴장감을 놓으면 쉽게 안이해질 수 있다. 현재 존경받는 학자가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법 학자로서 그의 연구 활동은 언제나 노동 현장과 연관된다. 막연하게 ‘무엇을 한 번 연구해 보자’라는 생각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실천을 위한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연구의 논제는 늘 현장에서 제기된 심각한 쟁점들 중에서 나왔다. 여성의 노동현실을 다룬 ‘여성, 노동, 법’(풀빛·1985), 1980년대 후반 이후 노동현장의 새로운 상황에서 노동법문제의 법리적 해명과 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노동인권과 노동법’(녹두·1996) 등이 모두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나온 성과였다.

그는 대학교수가 되고 나아가 총장이 됐지만 “정말로 되고 싶었던 것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중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었다”고 지금도 말한다. 특히 공고나 상고의 교사가 되어 고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청소년들에게 자긍심과 꿈을 주고, 그래서 건강한 사회의 주인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자격증이 없었던 그는 ‘차선책’으로 대학교수가 됐다. 총장으로 선출됐을 때도 그는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가르칠 시간이 없어진다며 총장직을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연구보다 학생들과의 만남을 더욱 보람 있게 여긴다. 신 총장은 “가르침이란 자기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여성지성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이화여대 총장으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이행한 후, 다시 가르치는 자리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는 인생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장편대하소설을 읽으며 지낼 편안한 의자와 아늑한 조명을 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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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노동법은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왔다" ▼

노동법은 자본제사회에서의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특수한 법 영역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기반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조건의 상호작용 가운데서 창출된 노동운동은 노동자단결의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했고 그것은 마침내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으로서의 노동기본권의 승

인 및 그 구체적 전개로서의 노동법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이런 법제도의 존속 기반은 어디까지나 자본제 시민경제사회의 일반적 요청 자체이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자본제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한 노동시장의 거래 전개의 요구와 일치하는 데 있다. 노동력이 가치대로 판매되지 못한다면 노동자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은 물론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어 자본제 경제사회의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인 노동력 재생산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확립된 법제도가 노동법인 것이다. (‘노동법과 노동운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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