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내 할아버지의 모든 것

  • 입력 2003년 5월 1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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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곱 살짜리 아이인 내가 있다. 남동생과 나를 대동하여 연말 모임에 참석하신 나의 할아버지는 내심 자랑스러우신 눈치다. 유난히도 사람 좋아하고 웃음소리 크신 나의 할아버지는 “얘가 우리 큰 손녀, 조 놈이 우리 장손”하시며 우리 남매의 엉덩이를 연방 떠미신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어른들에 둘러싸인 내 앞에 등장한 버섯 크림수프와 크고 딱딱해 보이는 빵 한 덩어리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나이에 비해 똘똘하다고 한껏 치켜 세우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어른스럽고도 세련되게 큰 빵을 먹고 싶은데 어쩐다? 할아버지는 어느 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가르쳐 주신다. “빵은 한 입에 먹을 만큼만 뜯어내는 거야. 그러면 수프에 찍은 다음 바로 입에 넣을 수 있잖아. 어때? 네 동생 빵은 직접 뜯어 줄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주먹보다 큰 빵을 처리하는 방법도, 수프에 빵을 적시는 어른스러운 제스처도 말이다.

#2 맏손녀인 나만이 유일하게 학생이라는 이유로 따라나서야 했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현장. 6·25전쟁 당시 갓난 아들(필자의 부친)과 아내의 손을 잡고 남으로 먼저 떠나시던 할아버지께 증조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여섯 동생들은 곧 따라 내려갈 테니 걱정 말고 출발하라고 했었다 한다. 난리통에 오고간 그 약속을 두고 40여년이 흘러서, 업고 내달렸던 갓난 아들이 어느새 중년에 들어섰지만 금세 만나마 했던 부모 형제는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창이던 그해,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로서는 집요하게 주변을 묻고 뒤지시는 할아버지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고, 한술 더 떠서 다리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를 업고 할아버지가 들르신 곳은 종로구에 있는 필동면옥. 어른 주먹만 한 만두며 국숫발이 구수한 냉면을 시켜놓고는 할아버지가 우셨다. 나는 멋도 모르고 덩달아 구슬퍼져서 그리도 좋아하는 냉면에 손도 대지 못한 밤이었다.

#3 21세기의 첫 해 나의 할아버지는 암선고를 받으셨다. 칠십 평생 동안 새벽 네 시면 일어나셔서 전단지 뒷면에 영어단어를 써 가며 공부하셨고, 오전 6시면 수영장에서 체력을 단련하시던 당신은 이미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지나 평온한 얼굴이다. 2001년 추석날, 잡지에 실린 나의 와인 에세이를 읽어드렸더랬다. “재은아, 와인 조금만 따라와 봐라.” 글을 다 읽어드릴 때 쯤 내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께 나는 향이 진한 레드와인을 한 잔 가득 따라다 드렸다. 잔 둘레에 코를 두고는 빙빙 돌려가며 향만 들이마시기를 1분여. “이 와인의 냄새만으로도 내가 취하는구나. 아름답고 황홀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시향소감을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얼굴빛, 음성, 가을 햇살 모두가 너무나 강렬한 그림을 이룬다.

#4 엊그제 필자는 서울의 역삼동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비가 내릴까 싶어 빨라지던 걸음은 ‘원주 추어탕’이란 간판을 보는 순간 멈추어 버렸다. 다음 스케줄을 모두 잊고 스르륵 추어탕집 안으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간다. 40, 50대 남자 손님들의 점심상으로 북적거리는 가운데 홀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나는 ‘추어탕 1인분’을 주문한다.

“젊은 아가씨가 웬일로 혼자 추어탕이래?”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며 나를 살핀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이집 단골이셨어요. 저도 할아버지 따라와서 처음 추어탕을 먹은 곳이 여기잖아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들어왔어요.”

첫 강의료를 탔던 99년 봄에도 할아버지를 이곳에 모시고 와서 점심을 사드렸었다.

그때는 그 봄이 마냥 길 줄 알았다. 혼자서 잘 끓어 오른 추어탕에 콩밥을 척척 말아 파김치랑, 동치미랑 맛있게 먹고 있는 지금의 내가 2003년의 봄에 있으니, 4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광활한 의미인지 새삼 놀라워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시인 김광균은 ‘오월화(五月花)’라 읊은 시에서 세월이 오면 꽃 피고 세월이 가면 꽃 지는데, 사람만 가면 안 온다고 했다. 무엇이고 영원할 수 없는 ‘유한성(有限性)’이 한정판으로 찍히는 골드 음반처럼 우리 생을 값지게 하고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아등바등하는 우리네 삶이란 실로 측은한 것이다. 다음 주면 돌아오는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혹은 주위 어른 누구에게라도 추어탕 한 그릇 사드리길….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이라 하지 않는가.

●버섯 크림수프

양송이 150g, 양파 100g, 버터 20g, 닭 육수 1컵, 생수 1컵, 생크림 3큰술, 파슬리 다진 것 약간, 소금, 후추, 화이트소스 재료(버터 15g, 밀가루 15g, 물 반 컵, 우유 반 컵)

○1 양송이는 머리와 기둥을 분리하여 머리는 얇게 잘라 둔다.

○2 냄비에 버터를 녹이고 같은 양의 밀가루를 넣어 저으면서 볶는다.

○3 2를 불에서 내린 후 우유와 물을 붓고 다시 불 위에 올려 저으며 데운다.

○4 양파는 슬라이스로 얇게 잘라 20g의 버터에 볶는다.

박재은

○5 4에 닭 육수, 생수를 붓고 1의 버섯 기둥을 넣고

10분 정도 끓인다.

○6 5와 3을 섞고 블렌더에서 한 번 돌려 고루 섞어준다.

○7 6에 1의 양송이 슬라이스를 넣고 한소끔 다시 데운다.

○8 7을 소금, 후추로 간하고 다진 파슬리와 생크림으로

상단을 장식한다.

박재은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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