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연의 젊게 삽시다]와인과 건강 그리고 전쟁

  • 입력 2003년 3월 6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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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와 포도주.’

역사에 해박한 사람이라도 언뜻 관련성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14∼15세기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 그 분쟁지역에 보르도 지방이 있다면 대충은 짐작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당시 영국 왕실에 포도주를 공급한 곳이 다름 아닌 영국령의 보르도 지역이었다. 1328년 프랑스왕이 된 필립 6세는 이를 돌려 받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115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영국의 우세승이었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이 아잔쿠르 싸움에서 압승을 거둬 1420년 영국 왕세자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인정된다.

이를 뒤집은 것이 잔다르크다. 전세는 역전되고 1453년 영국이 칼레 지방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300년 동안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보르도 지방과 와인이 프랑스인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보르도는 현재 10만5000㏊에서 연간 7억병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역이다.

포도주가 특정 지역의 기호품에서 세계인의 입맛을 지배하게된 것은 적포도주가 갖는 건강효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상은 또 ‘기아의 시대’에서 ‘포만의 시대’로 넘어가는 사회적 상황과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포식의 산물인 심장병에 포도주가 예방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이 구매충동에 불을 댕긴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가 프랑스 보르도대에서 심장병을 연구하던 셀슈 르노 박사다. 하루에 적포도주를 두세 잔 마신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률은 35%, 암 사망률은 18∼24% 더 떨어진다는 사실을 1992년 저명한 의학잡지인 랜싯에 발표했다.

유럽 국가를 상대로 광범위하게 조사한 보고도 있다. 10만명당 심장병 사망률을 분석했더니 포도주 소비량이 적은 스웨덴과 헝가리는 각각 375명, 370명인데 반해 프랑스는 180명 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포도주의 무엇이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를 폴리페놀이라는 항산화 성분이 갖고 있다. 폴리페놀은 노화를 촉진하는 유해산소의 작용을 차단한다. 최근 밝혀진 사실은 폴리페놀이 혈관 수축작용을 하는 엔도셀린-1이라는 물질의 생성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도주가 건강에 좋다는 논문은 주로 와인 생산국가에서 많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처럼 기후 때문에 포도주가 생산되지 않는 나라에선 심심치 않게 해악론을 제기한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한다. 포도주에 함유된 산이 치아의 법랑질을 녹여 이가 빨리 손상된다든지, 프랑스 사람들이 심장병이 적은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비타민E의 섭취량이 많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어쨌든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포도주는 적당히만 마신다면 좋은 게 사실이다.

포도주가 거대 산업으로 발전하자 포도산지를 확대하고 와인을 국가차원에서 전략상품으로 키우려는 노력도 대단하다. 이미 이탈리아가 포도주 수출량에서 프랑스를 앞서 1위를 차지했고, 스페인과 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호주, 미국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최근 미국 텍사스대 의대에서 발표한 포도주스 관련 논문도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2주 동안 매일 포도주스를 마신 그룹에서 항산화물질인 플라보노이드가 몸무게 1㎏당 1mL씩 증가했고, 나쁜 콜레스테롤인 저밀도 콜레스테롤의 안정성이 높아져 산화와 혈관침착이 덜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특정지역상품의 포도주스를 대상으로 실시된 이 조사를 보면서, 기호식품을 개발해 세계화하고, 건강 효과를 연구함으로써 그 결과를 음식 문화 마케팅에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쉽게 느껴진다.

와인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백년전쟁은 지금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무연 제롬 크로노스 원장·의사 mylee@GeromeKron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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