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응의 미술과 시장]<21>국내기업 컬렉션의 문제점②

입력 2003-02-16 18:39수정 2009-10-1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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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레시브는 본격적인 컬렉션을 시작한 1985년 이전까지는 미국의 수많은 이름 없는 보험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1985년 이후 획기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이 회사가 일궈낸 경이로운 성장은 미술품 수집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였던 피터 루이스는 늘상 접하는 미술품이 알게 모르게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 즉 미술품이 사람의 기존 관념을 깨고 새롭게 사고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창의력과 독창성을 키워주기 위해 매년 50만달러(약 6억원)의 예산을 들여 젊은 작가들의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유명작가의 작품 1점을 사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무명작가의 작품은 200∼300점씩 넉넉히 살 수 있었다.

그가 사들인 그림들은 때로는 너무 도발적이어서 직원들의 격한 반발과 논쟁을 불러왔다. 한 예로 본사 직원식당에 걸려있는 케리 제임스 마셜(Kerry James Marshall)의 그림이 흑인을 모욕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직원들이 거세게 항의한 적이 있다. 회사 큐레이터인 토비 데반 루이스(Toby Devan Lewis)는 일주일 동안 이 그림 앞에서 직원들과 대화하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사태를 진정시켰다.

피터 루이스는 이 사건에 대해 큐레이터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이런 반응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는 모든 직원이 모든 미술품을 좋아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원들이 미술품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특한 것은 프로그레시브 직원은 식당이나 로비 같은 공공장소가 아닌 자신의 사무실에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걸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레시브의 소장품은 현재 5000여 점에 이르며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품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천문학적인 금전적 가치를 떠나 프로그레시브의 컬렉션은 항상 매스컴의 화제에 오르내린다. 무수히 많은 상을 받았고 유명 미술관들이 대여를 요청하는 회사의 자존심이며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 회사는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보험회사로 성장했다.

국내에서도 한때 기업의 미술품 컬렉션과 미술관 설립이 붐을 이뤘다. 그러나 뚜렷한 철학이나 안목 없이 오너의 허영심에서 출발해 큐레이터도 없이 오너의 취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컬렉션이나 미술관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돈만 낭비하고 유명무실해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 soonung@seoulauc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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