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퐁뒤 유럽식 샤브샤브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6시 37분


‘나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다. 인파로 붐비는 샹젤리제 거리로 나가본다. 루이뷔통 쇼핑백을 두 손 가득 들고 가는 동양 관광객들, 껄렁하게 무리지어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구경하는 중동계 이민자들, 큰 목소리로 수선스러운 미국인들. 온통 이방인 천지다.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곧게 줄지어 서있는 가로수에는 반짝이는 꼬마전구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말해준다.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명절은 의지가지 없는 이방인들에게 골병이 들 정도의 외로움 덩어리다. 10년 세월을 꼬박 혼자 지낸 나의 90년대는 찬바람에 떠오르는 가족들 목소리로 해마다 가슴 찡한 겨울이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종착점은 드골광장의 개선문이다. 나폴레옹 제국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문은 보는 이의 마음을 뿌듯하게 가라앉힌다. 에펠탑, 세느강과 더불어 파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꼽히는 개선문은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의 배경이자 제목이기도 하다.

●개선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으로 무겁고 우울한 도시로 변모한 파리에 반나치 세력으로 밀입국한 주인공 라비크가 있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몰래 외과 시술하는 것으로서 밥벌이를 하는 그에게 유일한 사치는 칼바도스(사과 브랜디)를 마시는 일이다. 그가 머무는 싸구려 호텔 ‘앙테르나시오날(International)’에는 생계가 어려운 이방인들이 가득하다.

라비크는 세느 강변에서 어느날 밤 우연히 만난 카바레 여가수 조앙 마두와 사랑을 한다.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혼란의 시대에 지펴지는 사랑이란 불안하면서 절실하고, 꺼질듯 꺼질듯 위태로우면서도 질기다.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들의 사랑도 지나고 결국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로 후송되는 라비크가 “사방이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독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문은 누구를 위한 개선문이기에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파리에는 ‘예술’의 진한 냄새가 골목마다 마구 섞여 있다. 특히 나를 사로잡는 프랑스의 무언가는 바로 그들의 언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불어 동사 ‘tomber’는 ‘떨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fall’이라는 영어 단어보다 좀 더 몸을 ‘던지는’듯 격한 어감을 전해주는 이 단어는 특히 ‘사랑에 빠지다’라는 표현에서 그 빛을 발한다. 또 나를 가슴 뛰게 만드는 동사로는 ‘녹다’라는 뜻의 ‘fondre’가 있다. 혀로 스미듯이 녹는 맛을 표현해주는 ‘fondre’가 변형된 단어 ‘퐁뒤(Fondu)’는 ‘녹은’이라는 완결된 상태를 뜻한다.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스위스 요리 ‘퐁뒤’는 바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치즈도 정도 추위도 모두 모두 녹여버리는 퐁뒤 요리를 만들어 보자.

●퐁뒤

흔히들 ‘퐁뒤’하면 냄비 하나 가득 녹아버린 치즈 정도를 떠올리겠지만, 퐁뒤의 맛과 종류는 의외로 다양하다. 퐁뒤의 원산지인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우리네의 ‘전골’과 같은 존재이니까. ‘퐁뒤’를 ‘무언가를 녹여서 요리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하나의 조리 형태로 본다면 응용할 수 있는 메뉴의 범위는 배로 늘게 된다.

우선 정석대로 치즈가 주재료인 치즈 퐁뒤를 보자. 퐁뒤는 18세기 유럽의 사냥꾼들이 마른 빵과 치즈만을 싸들고 추운 산 속을 헤매던 와중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치즈를 끓일 수 있는 작은 냄비의 안쪽에 마늘을 한바퀴 문질러 향을 내주고 치즈를 녹인다. 녹은 치즈에 화이트 와인을 부어주는데, 지방마다 가정마다 첨가하는 와인의 종류가 다르므로 완성되는 퐁뒤의 향미가 천차만별 달라진다. 체리향이 매혹적인 증류주 키어쉬(kirsch)를 흘려 넣기도 하는데, 보드카만큼 알코올도수가 높은 키어쉬는 느끼한 치즈냄새를 눅여준다. 기름진 중국요리에 고량주를 마시듯 향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퐁뒤 조리법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치즈가 부담스러운 이들은 고기 퐁뒤를 시도해 보자. 끓는 육수에 고기를 살짝 넣어 익혀 먹는 일본식 샤브샤브와 비슷하다. 다만 퐁뒤는 샤브샤브를 만들 때 쓰는 육수대신 비계를 ‘녹인’ 기름을 사용한다. 샤브샤브가 고기를 데치는 정도라면 퐁뒤는 고기를 튀겨 먹는 요리라고나 할까? 기다란 꼬챙이 끝에 준비된 고기조각을 끼워서 바작바작 끓는 기름냄비에서 톡 담가 튀겨내고 나면 준비된 소스에 찍어먹게 된다. 두꺼운 베이컨을 기름에 함께 녹여 거기에 안심을 설익었다 싶게 익힌 뒤 겨자소스를 찍어 먹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 와인에든 소주에든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일등안주다.

빙 둘러앉아 꼬챙이에 고기를 끼워가며 먹는 맛이란 서양요리같지 않은 친근함이 있다. 함께 마시는 술의 종류에 따라 소스를 만들어 보자. 와인에는 토마토나 크림 혹은 스테이크 소스를, 매실주나 정종에는 고추냉이장이나 톡 쏘는 겨자가 좋다. 칠리소스나 바비큐소스에 찍어서 맥주와 함께 즐겨도 부담없다.

퐁뒤라는 조리방식으로 코스요리를 준비할 수도 있다. 전채요리로 치즈 퐁뒤에 브로콜리나 감자 등을 찍어 먹다가 다양한 소스의 고기 퐁뒤로 메인 코스를 장식하고,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녹여서 카스텔라나 과일을 찍어먹는 디저트 퐁뒤로 마무리하면 된다.

퐁뒤든 전골이든 혼자서는 못 먹는 음식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맛이 살아나는 음식이다. 파리에서 살던 시절의 어느 겨울밤, 몽마르트르 언저리를 걸어가던 나는 유명한 퐁뒤 레스토랑 앞을 지났다. 음식점 창문으로 바라본 레스토랑 안은 가족 단위의 손님들로 터져버릴 듯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를 왼쪽 무릎에 앉히고 오른손으로는 초콜릿에 담갔던 바나나를 먹이려는 젊은 엄마, 고기 퐁뒤를 안주삼아 한 잔 걸친 불그스레한 얼굴의 노신사, 치즈 퐁뒤에 샤블리와인을 사이에 두고 눈길이 뜨거워지는 젊은 부부…. 걸음을 멈춘 나는 팔다 남은 성냥을 등에 지고 따뜻한 저녁식탁을 훔쳐보는 성냥팔이 소녀마냥 어깨를 움츠렸다.

거대한 원을 이루며 돌아가는 우주 속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어지게 되는 우리들은 모두가 우주 속의 이방인들이지만, 이방인들끼리 만나서 이루게 되는 ‘가정’이란 삭막한 우주를 데워주는 신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들 생각이 나는 걸 보니 또 한 해가 갔나보다.

▼서울 시내 퐁뒤 전문점▼

스위스로,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가지 않아도 따끈한 퐁뒤를 즐길 수 있는 서울 시내 퐁뒤 전문레스토랑들.

1. 앤치즈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주인 부부의 치즈 사랑으로 널리 알려진 곳. 주인이 특별히 애착을 갖고 관리하는 치즈 저장실이나 다양하고 전문적인 치즈 선택 등 치즈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전문적인 곳이다. 단골이 되어 오가는 사이에 손님들이 치즈박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 02-511-7712

2. 샬레 스위스

내년이면 개업 20주년을 맞는 정통 스위스 레스토랑이다. 한남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곳은 스위스 전통음악이 저녁마다 울려퍼져 분위기가 이국적이다. 특히 아이들을 데려갈 만한 곳으로 권하고 싶다. 02-796-6379

3. 레퐁듀

규모가 큰 레스토랑으로 대중적인 분위기와 메뉴를 지향한다. 퐁뒤의 종류가 몇가지로 준비되어 있어서 선택할 수 있으며 특히 단체로 가기에 무난하다. 02-541-8066

●치즈퐁뒤와 야채

그뤼에르치즈 1/2컵, 에멘탈치즈 1/2컵, 마늘 반톨, 화이트와인(기호대로), 키어쉬 약간, 단호박 60g, 감자 1개, 바게트 빵조각.

1. 조그맣고 깊이가 있는 냄비의

안쪽을 마늘로 한 번 칠한다.

2. 치즈를 넣고 녹인다.

3. 치즈가 완적히 녹으면 와인과

키어쉬를 붓고 향을 낸다.

4. 살짝 쪄 둔 호박, 감자 그리고

작게 썬 빵조각을 3에 묻혀서

먹는다.

박재은

●초콜릿 퐁뒤

다크 초콜릿 200g, 오렌지 껍질 약간, 바나나, 체리, 말린 살구 등 당도있는 과일, 카스텔라 약간

1. 다크 초콜릿은 조각내어 볼에

담아 끓는 물에 중탕으로 녹인다.

2. 다 녹은 초콜릿을 냄비에 붓고

작은 촛불이나 램프로 온도를

유지하며 오렌지 껍질을 첨가해

향을 낸다.

3. 한입 크기로 썰어둔 과일이나

카스텔라 등을 찍어가며 먹는다.

박재은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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