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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아이스크림의 유혹

입력 2002-12-05 16:16업데이트 2009-09-17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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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교 기자
부하직원으로 분한 마이클 더글러스와 그의 상사 데미 무어 사이의 사내 섹스 스캔들, 음모를 다룬 영화 ‘폭로(Disclosure)’. 오래 전 연인이었다가 부하 직원으로 재회한 남주인공을 자신의 집무실로 유혹하는 여자 상사는 옛 애인이 가장 좋아하던 귀한 와인을 책상 위에 보란듯이 준비해 둔다. 어색하게 사무실에 들어서던 남자는 와인을 보자 사탕을 발견한 아기마냥 한모금, 한모금 분위기에 말려든다.

허진호 감독의 나른한 4월같은 영화 ‘봄날은 간다’. 함께 일을 하다가 서로 끌려드는 남녀는 일이 끝나 헤어져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때 여주인공(이영애)은 이렇게 말하며 남주인공(유지태)을 자신의 아파트로 유혹한다.

“라면 먹고 갈래요?”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지만 교육에 의해 ‘문화’라는 포장을 입게되고 ‘사람’이 된다. 하지만 때로 이런 포장들에 가려져 사람이기 이전에 동물인 우리들의 욕구나 본능은 쉽게 간과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동물들은 눈앞의 미끼에, 유혹에 약하다. 낚시를 할 때 우리는 미끼를 접한 물고기의 마음이 동하도록 크기나 종류를 구별하여 던진다. 동물세계에서는 암컷이 수컷을 유혹할 때 몸에서 뿜어대는 호르몬의 독특한 냄새를 이용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호르몬의 향취나 적나라하게 꿈틀대는 미끼보다 조금 더 진보된, 문화적 코드가 섞인 유혹이 필요하다. 그 중 하나가 음식이 되기도 한다. 거부할 수 없이 귀한 와인으로 옛 애인을 유혹했듯이, 연하의 상대를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라면으로 유혹했듯이 말이다.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 이 전설적 인물은 ‘금욕’이 미덕이었던 시대에 이미 ‘유혹의 맛’을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만나게 되는 연애 상대마다 취향과 특성을 재빨리 파악하여 함께 즐길 메뉴를 준비하였으니 말이다. 젊은 처녀를 유혹할 때는 저항할 수 없이 달콤한 초콜릿을, 귀부인을 위해서는 허영을 만족시킬만한 샴페인을 택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어필하는 ‘유혹의 맛’이란 상대적이며 사회적이다.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있다고 치자. 무더운 여름이라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유혹적이다. 땡볕에 질려버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단박에 핥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한다. 추운 겨울에는 얘기가 다르다. 아이스크림을 받쳐주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리하여 치장을 한다. 비교적 입맛이 젊은 상대를 위해서는 영화 ‘블루’의 줄리엣 비노시처럼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로 뜨겁고 쓴 에스프레소를 붓는다. 혀에 온냉의 감촉이 동시에 닿고 목구멍을 지날 때 퍼지는 쌉싸름한 단 맛이 충분히 유혹적이다. 상대방이 비교적 지긋한 나이라면 사과나 바나나를 버터에 따끈히 볶아서 계피가루로 향을 낸 후 아이스크림 위를 덮어본다. 혀에 오는 맛은 여전히 온냉이 함께 오지만 직선적인 쓴 맛이 악센트격의 계피로 대치되어 한결 부드럽다. 이쯤은 준비할 수 있어야 던져볼 수 있지 않은가.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요?”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분냄새 화려한 아내와 그녀에게 몸뚱아리를 의지하며 방구석이 생활 반경의 전부인 주인공이 있다. 장지문 너머 아내의 방은 늘 내방객(?)들로 분주한 기이한 부부 사이다. 그런 가운데도 아내는 꼭꼭 끼니를 챙겨 남자의 방에 상을 넣는다. 주인공은 말한다.

“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반찬이 너무 엉성하였다. 나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모이를 넙죽 받아먹기는 했으나… 아내가 흔히 쓸 수 있는 저 돈의 출처를 탐색해 보는 일변 장지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랫방의 음식은 무엇일까 간단히 연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끼니’와 유혹이 내재된 ‘맛’의 차이를 알게 된다. 연명만 시켜주면 그만인 윗방의 남편에게는 찬 기운 도는 ‘끼니’를, 아랫방의 분냄새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장지문을 뚫고 퍼지는 냄새를 지닌 ‘맛’을 대접하는 것이다.

권력과 욕정이 넘쳐나던 궁궐 안 생활. 궁내의 많은 이들이 왕을 유혹하는 방법은 셀 수도 없이 다양했을 것이다. ‘절대권력자’를 유혹하는 방법의 하나로 음식이 이용되지는 않았을까?

기록에 따르면 링컨 대통령은 생굴을, 스탈린은 사슴고기를, 징기스칸은 메뚜기를 즐겨 먹었다 한다. 영락제가 사족을 못 썼다는 중국요리 ‘불도장’도 유명하다. 역사 속 통치자들은 나름대로 편애하던 메뉴들로 나라 안팎의 근심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나보다. 흥미로운 것은 거론되는 요리들의 대부분이 귀한 맛도 맛이거니와 스태미너식이었다는 점. 맛에 몰두해 한 입씩 들다보면 몸의 기운이 왕성해져서 좀 더 유혹에 가까운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일까 추측해 본다. 카사노바의 연애장면마다 등장하는 굴이나 초콜릿만 봐도 유혹의 맛들은 고영양식인 경우가 많다.

박재은

‘유혹의 맛’을 연출하려면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숙지와 배려가 요구된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거리의 여인 줄리아 로버츠를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데려온 남자 리처드 기어는 샴페인과 딸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유혹의 대명사인 샴페인의 가치나 에로틱한 딸기의 의미를 모르는 여자에게는 한잔의 소다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부족으로 빚어지는 실수다.

‘유혹의 맛’이란 계피나 육두구의 향내가 진동하고 피를 뜨겁게 하는 원색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라는 첫 인상을 주지만 결국 상대에 대한,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는 휴머니즘으로 귀결된다. 세속적으로 ‘유혹’하면 떠올리게 되는 ‘테크닉’보다도 한 겹 더 깊은 곳에는 마음이 수반되는 ‘저력있는 유혹’이란 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맛들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이 들어가는 동시에 그리움 또한 지니게 되니까. 원색적인 첫 맛과 인간적인 속맛, 그 후의 그리운 끝맛으로 사라지는 ‘유혹의 맛’은 슬프도록 맛있을 터이다.

●아이스크림을 덮은 사과조림

사과 1개, 버터 45g, 설탕 1큰술,브랜디나 럼 약간, 계피가루

1. 사과는 한 입 크기로 예쁘게 썬다.

2. 팬에 버터를 달구어 1의 사과를 바싹 지지다가 앞뒤가 노릇해지면 브랜디나 럼을 첨가한다.

3. 불을 약하게 줄이고 설탕을 뿌려서 녹인다.

4. 불을 끄고 계피가루를 뿌린다.

●유혹의 맛-트뤼프 초콜릿

생크림 100g, 다크초콜릿 250g,럼 약간, 캐러멜이나 누가 50g,

버터 1큰술, 코코아가루

1. 생크림을 따뜻이 데운다.

2. 1에 버터와 다진 초콜릿을 넣고 저어가며 함께 녹인다.

3. 2에 럼주를 조금 넣어 향을 낸다.

4. 잘게 부순 캐러멜을 3에 넣고 섞는다.

5. 4를 불에서 내려 꾸덕꾸덕해지면 둥글게 빚어서 코코아 가루 위에 굴린 후 냉장고에서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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