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LOOK]“연극성 부족 아쉬웠소”…뮤지컬,음악,무용

  • 입력 2002년 12월 2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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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과 도미, 여경의 삼각관계를 주 갈등으로 삼고 있는 뮤지컬‘몽유도원도’./동아일보 자료사진
아랑과 도미, 여경의 삼각관계를 주 갈등으로 삼고 있는 뮤지컬‘몽유도원도’./동아일보 자료사진
《뮤지컬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자립이 가능한 연극의 한 형식입니다. 배우들의 가창력과 춤, 그리고 연기력이 크게 향상되어 있어 뮤지컬의 전망을 매우 밝게 합니다. 다만 아직도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상당부분 복사하는 공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요. 그 가운데 뮤지컬 극단 에이콤은 창작 뮤지컬을 개발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명성황후’ 이후 최대의 야심작 ‘몽유도원도’가 그 예술적 완성도를 떠나서 일단 평단의 주목을 받아 마땅합니다. 음악과 연극의 관점에서 분석적 비평을 시도해봅니다. 연극평론가와 음악평론가가 한 작품을 상대로 함께 비평하기는 아마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용평론가 김채현 교수는 국제교류에서 국제교역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는 춤계의 사정을 전하면서 대전시립무용단과 포즈댄스시어터를 벤치마킹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우수한 작품들이 수시로 내한 공연되고 있는 요즘 국제적 경쟁력 없는 공연예술은 국내에서도 살아남기 힘들게 됐습니다. 김 교수의 경종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김윤철 연극원 교수》

■ ‘몽유도원도’ 연출가 윤호진兄께 “연극성 부족 아쉬웠소”

윤형, ‘몽유도원도’를 잘 봤소. ‘명성황후’ 이후 또다시 세계 시장을 겨냥해 6년 전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다면서요? 예술가로서의 집념이 참 대단하오. 30년 넘게 형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 집요함이야말로 연출가 윤호진의 최대 강점이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그래서 사회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형이 진지한 연극과 결별하고 오락성과 대중성을 최고 가치로 삼는 뮤지컬에 투신했을 때 나는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았소. 그그런데 ‘몽유도원도’를 보니까 공연에서 연극성의 부족이 제일 크게 느껴집디다. 혹 뮤지컬만 연출해서 연극적 감각이 마모된 것은 아닐까, 더 좋은 뮤지컬을 연출하기 위해서 다시 정극 연출을 병행할 필요는 없을까. 기분 나쁘시겠지만 나는 형을 위해 이런 우문들을 던져봤소.

내가 왜 연극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말하지요. 최인호의 원작소설을 형이 각색하면서 해석을 특별히 달리 하진 않았으니까, 소설이나 희곡 모두 아랑(이혜경), 도미(서영주), 여경(김성기)의 삼각관계를 주 갈등으로 삼고 있지요. 여경이 아랑을 도미에게서 빼앗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랑과 도미가 사랑을 완성하고 여경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는 구성인데, 여경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게 종결되는 비극적 결말이고, 아랑이나 도미의 입장에서 보면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희극적 결말인 셈입니다. 문제는 연극적 가능성이 높은 이 서사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이정표들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오. 이를테면 여경이 꿈에서 만난 절색의 아랑에 집착하는 과정을 너무 가볍게 처리하여 그의 병적 사랑이 부각되지 않았고, 여경이 자치권과 아랑을 판돈으로 걸고 내기 바둑을 제안할 때 도미의 고뇌가 부족하게 표현되어 그가 패한 뒤 괴로워할 때 관객이 동정하기가 어려웠소. 무엇보다 도미와 아랑의 사랑이 선언만 됐지 그 성격이나 동기가 형상화되지 않아서 아랑이 아름다운 자기 얼굴을 자해하면서까지 도미에 대한 사랑을 수호하는데도 감동이 뒤따르지 않습디다. 그래서 마지막에 여경이 자결하는 것이 내외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아요.

형의 연출노트를 보면 한국보다는 세계, 특히 서구의 뮤지컬 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데, 한국의 관객을 매료시키지 못하고 서구의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영화 ‘서편제’가 그랬던 것처럼 혹 여성학대의 혐의를 받지는 않을지 걱정이오. 박동우의 무대미술도 상식 수준이고 김성기와 이혜경의 노래는 불안한 음정을 과도한 감정으로 숨기기에 급급했소. 다만 여경의 충복 향실 역의 조승룡만이 수준급의 가창력과 순수한 연기력을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역할은 등장인물로서의 존재이유를 주장하고 있지 못해요.

윤형, ‘몽유도원도’를 계속 발전시킬 계획이지요? 나의 진단과 처방이 도움이 된다면 참 좋겠소.

김윤철 연극원 교수·연극평론가

■ ‘몽유도원도’ 음악 ‘사랑의 테마’ 유감…편곡, 그 절반만의 성공

대부분의 창작 뮤지컬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음악이다. 몽유도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명성황후’와는 달리 최소한 나에게는 한 선율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의 테마라는 정도의 타이틀이 적절해 보이는 이 선율은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안고 있다. 그런데 그 선율을 만드는 작곡가의 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국악가요를 대중화한 김영동의 것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국악적인 음계에 서양음악식 화음을 붙이면 그런 유의 선율은 자동적으로 나온다. 더 김영동을 떠올리게 한 것은 이 노래의 반주를 국악기인 대금이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선율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1막과 2막에서 각각 한 번, 모두 두 번 정도로 기억된다. 아마도 작곡자는 이 노래를 이번 뮤지컬의 대표곡으로 생각한 것 같다.

뮤지컬 청중이 듣고 싶어하는 이른바 ‘히트송’이 뮤지컬에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 노래를 뮤지컬이 진행되는 2시간 남짓 동안에 히트송으로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 작곡자는 청중들이 일단 극장 밖으로 나가면 그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작곡자는 작심하고 그 ‘히트송 후보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여기저기서 똑같은 선율을 반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여기서 편곡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어차피 ‘몽유도원도’는 개개의 독립적인 노래의 나열로 구성된 뮤지컬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전체를 통해서 이 주제 선율의 다양한 변주와 암시가 곳곳에 자주 나와야 한다. 이때에 편곡자의 능력이 발휘된다. 몽유도원도의 제작팀은 외국 음악인을 편곡자로 내세웠다. 짐작컨대 그의 역할은 작곡자의 선율을 관현악 반주로 편곡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종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는 두 종류의 편곡자가 있다. ‘몽유도원도’의 편곡자처럼 관현악 편곡을 주로 하는 전문가가 있고, 또 다른 편곡자는 작곡자의 선율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꾸어 전체 뮤지컬의 음악적 흐름을 책임진다. 만약 이번 ‘몽유도원도’의 편곡자에게도 두 종류의 임무가 주어졌다면 그는 절반만 성공한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2막의 첫 장면은 일종의 굿으로 이 작품에서 또 그 이전의 ‘명성황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음악적으로 뛰어난 부분이었다. 작곡자와 편곡자는 굿의 분위기를 음악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극의 핵심이 아닌 이런 장면이 성공하면 안된다는 데에 있다.

허영한 음악원 교수· 음악평론가

■ 글로벌시대 춤 자립전략…한국춤, 세계를 보자

최근 몇 해 동안 해외 춤단체는 한국에서 해마다 100건 이상 공연하여 국내 공연 실적에서 비중이 커가고 있다. 국내 춤단체의 해외 공연도 1999년에는 360건에 달했다. 21세기에 춤공연은 글로벌 차원에서 진척될 것이다.

국내외 단체의 국내외 공연을 교류라 하는 것은 이미 옛말이고 교역(交易)으로 방향을 트는 중이다. 춤교역 시대에 자립도가 낮은 춤은 입지가 더 좁아질 것이다. 자립도 증대 문제는 춤계가 직면한 중대 현안이다.

그 자구책의 하나로서 먼저 대전시립무용단을 주목해보자. 지난해 상반기 대전시립무용단의 새 상임안무자로 한상근(韓相根)이 임명되고부터 대전 춤계에 굵은 흐름이 형성되었다고들 이구동성이다. 그 후 몇 차례 현지 방문한 필자도 공감하는 바다.

이 무용단은 대전 시내의 보문산 주말 공연으로 그간 방치된 생태공원을 문화공간으로 회복시키고, 시립미술관 노천무대 월별 창작 공연에서 춤마니아를 확보해 가는 중이다. 이와 함께 무용단 운영 방식을 일신해서 대전시립무용단이 대전의 춤 흐름 및 활동에서 구심점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시행사 동원 부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밀착된 예술단체로서 위상을 바로 세우고 대전 내부의 무용인 자산을 결집하여 창작 활성화를 자극하면서 시립무용단은 국내 춤계에서 대전의 이름을 주지시키고 있다. 10월의 정기공연은 국내의 어느 시립단체보다 실험성이 앞서는 창작으로 공립무용단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쇄신시켰다.

한 도시 단위로 춤에 대한 시민의 호응도는 자본보다 더 중요한 춤 자립의 초석이다. 대전시립무용단을 벤치마킹해보기를 제안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간 무용단으로서 포즈댄스시어터의 활약은 남다르다. 11월의 서울-뉴욕 재즈 페스티벌(호암아트홀)에서도 몸의 유연성과 폭발력을 거듭하여 포즈는 춤의 품격과 진가를 보여주었다. 하급 대중예술에 불과하다는 재즈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은 포즈의 활약으로 5년 전부터 허물어져 왔다. 포즈는 그간 국내외 초청 프로그램에서 세계 정상급 단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판을 벌였다. 내년에는 이탈리아 초청 공연과 유럽 투어가 잡혀 있다.

상업적 재즈를 멀리하고 표현성이 농후한 재즈로써 국내에서 잠자던 관객을 다수 확보한 것은 포즈의 일차적 성과이다. 그러나 포즈에 국내 무대는 세계 무대의 일부일 뿐이다. 다수의 걸출한 국내 춤꾼만으로 세계 정상을 구가하는 포즈는 확실히 예외적이다.

21세기는 춤 공연도 세계경영 시각에서 고려해야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때문에 무엇보다 공공재(公共財)로서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춤이 도태하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대전시립과 포즈, 두 단체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구태의연하게 재탕 삼탕하는 공립 단체, 무용인 관객 주변을 맴도는 단체는 취미 클럽에 지나지 않을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김채현 무용원 교수·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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