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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 그사람]'하일성의 입'을 만든 배구해설가 오관영씨

입력 2002-10-27 18:19업데이트 2009-09-1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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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 야구해설가
요즘 같으면 ‘하일성 모르는 야구팬은 간첩’이라고 하겠지만 해설가 데뷔 시절의 나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게다가 지금에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말재주가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무명에 눌변이라니…. 이런 내가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오로지 그 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나는 1967년 경희대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했지만 1학년을 마친 뒤 자원 입대했고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결국 야구도, 대학교수도 둘 다 놓친 나는 체육교사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고 74년 첫 부임지인 경기 양곡고를 거쳐 78년 서울의 환일고로 전출했다.

여기서 나는 ‘운명’을 만나게 된다. 체육교사로는 드물게 나중에 환일고 교장까지 역임했던 오관영씨.

나의 직계 상사였던 그는 이미 그때 동양방송(TBC)에서 유명한 배구해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모양이다. 마침 79년 초 TBC에서 야구 축구 농구 배구 테니스 등 앞으로 프로화가 예상되는 5개 종목에 걸쳐 해설자 육성방안이 나오자 그는 나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팔자에도 없던 해설가가 되고 난 뒤 어려움도 많았다. 첫 중계 때는 마이크 앞에서 입이 얼어 버렸다. 내가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당시 조봉환 프로듀서가 소주 한 병을 컵에 부어 억지로 마시게 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난 뒤 나의 거취 문제를 놓고 TBC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때 오관영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바람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금의 내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전화를 걸어주시고 우리 애들은 그를 큰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서로 오래 알면 닮는다고, 최근에 심장수술까지 같이 한 우리는 지난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때는 새벽까지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하일성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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