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9>동작진

  • 입력 2002년 10월 25일 18시 46분


지금 동작대교가 놓여 있는 동작나루 일대를 서울 쪽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관악산 우면산이 먼 산으로 처리되고, 현재 국립현충원이 들어서 있는 동작마을 일대가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삼도(下三道·서울 아래쪽의 충청 전라 경상 3도)로 내려가는 가장 큰 나루답게 마을 아래 강가에는 근 20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 중 한 척이 나귀와 사람을 싣고 힘차게 삿대질하며 서울 쪽으로 건너오고 있는데 서울 쪽 백사장에는 구종(驅從·말 모는 종)을 거느린 선비 일행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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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강 건너에서는 과천 쪽에서 올라온 선비 일행이 나룻배를 부른 듯 사공이 긴 삿대로 배를 물가에 대려 하는데 나귀 탄 선비는 깎아지른 동작산 높은 봉우리에 압도당한 듯 이를 올려다보기에 여념이 없다.

이 동작산 제일봉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 굴길이 뚫려 있고 배가 떠있는 지점으로는 동작대교가 가로지른다. 선비가 지나왔을 길은 지금 과천으로 넘어가는 동작대로가 돼 있고, 길가 강변에 운치 있게 솟은 낮은 산봉우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 채 동작대교를 출입하는 고가차도가 놓여 끊임없는 차량행렬이 토해내는 소음과 매연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승방천(僧房川)이라 부르던 반포천(盤浦川)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수교(梨水橋) 일대와 반대편 흑석동 쪽 강변마을은 버드나무 숲이 가득 우거져 있다.

이때 동작마을은 서울 세가(世家·대 물려 특권을 누리며 사는 집안)들의 별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듯 번듯한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겸재의 제자였던 근재 박윤원(近齋 朴胤源·1734∼1799)은 ‘동작나루를 지나며(過銅津)’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성곽 나서자 티끌 같은 세상일 없고, 강물빛 비 맞아 다시 새롭다. 배에 앉으니 산은 저절로 오가고, 물가에 나앉자 백로와 서로 친하다. 물위에 정자 많으나, 누각엔 주인이 적다. 누가 능히 내게 빌려줘 살게 하려나, 꽃과 대나무에 경륜(經綸)을 붙여보겠네.’

이 동작마을 서쪽 뒷산 중턱에는 선조대왕의 조모인 창빈(昌嬪) 안(安)씨의 묘소가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서 양주 장흥(長興)에 있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태어난 손자가 선조(宣祖)가 됐고, 선조의 자손들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광복 후 이 일대를 국립묘지로 선정한 것도 이런 명당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조 20년(1744)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32.6×21.8㎝ 크기의 개인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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