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0>소요정

  • 입력 2002년 8월 22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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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정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있던 정자인데 고종 28년(1891)에 편찬된 ‘양천현읍지’에 이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겸재가 영조 18년(1742)에 그렸으리라 생각되는 이 ‘소요정’에도 정자의 모습은 없다. 이때도 아마 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자는 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약 이때 정자가 남아 있었다면 겸재는 한강 하류인 서북방에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바라보는 시각으로 탑산과 광주바위를 그려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강 상류인 동남쪽에서 탑산 남쪽의 소요정을 바라보는 시각이거나, 적어도 강 가운데서 서쪽으로 소요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요정이 있었다는 탑산 남쪽은 보이지도 않는 시각으로 탑산과 광주바위를 그려놓았다. ‘공암층탑(孔岩層塔)’에서는 탑산 기슭 남쪽에 세워진 석탑을 보이게 하려고 시점을 허공에 높이 띄웠는데, ‘소요정’에서는 시점을 수면으로 낮춰서 허가바위 절벽에 가려 석탑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세 덩어리의 광주바위가 더욱 우람하게 앞을 가로막고 허가바위 절벽은 까마득하게 솟아나서 그 위 탑산 뒤 봉우리를 압도한다.

허가바위 근처 강물에는 거룻배 한 척이 떠 있는데 삿갓 쓴 어부 두 명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태평하게 앉아 있다. 이 그림은 소요정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요정이라는 그림 제목을 붙이면서도 소요정은 그 터마저 보이지 않게 그려 놓았다.

이 정자를 지은 소요정 심정(逍遙亭 沈貞·1471∼1531)은 중종 때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심정의 집안은 그 증조부인 심귀령(沈龜齡·1349∼1413)이 태종이 등극하는 데 공을 세워 좌명(佐命)공신이 된 이래 그에 이르기까지 4대가 공신으로 군림한 대표적인 훈구공신 가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으니 양천 공암진 일대와 개화산 일대가 모두 그 집안의 소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훈구세력을 억제하려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 일파의 사림 세력은 항상 그를 훈구세력의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다. 훈구세력은 공훈을 세운 기득권층이고 이에 대항하는 신진 선비층은 사림이라고 불렸다.

심정은 중종반정(1506)에 참여해 ‘정국(靖國)공신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져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치지만 그때마다 조광조 일파는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혼탁하고 권세를 부리며 제멋대로 한다는 트집을 잡아 탄핵해 쫓아냈다. 이에 심정은 중종 2년(1517)에 이 공암진 탑산 남쪽에 소요정을 짓고 물러나와 울분을 달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심정은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 소요유(逍遙遊)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지 못하고 사림세력을 일망타진할 기책(奇策)을 강구해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심정은 이런 음모가 드러나 중종 25년(1530)에 평안도 강서(江西)로 귀양갔다가 그 이듬해 사사(賜死)되고 만다.

이렇게 역사의 죄인이 된 심정의 정자가 사회의 보호를 받았을 리 없다. 그래서 심정이 죽은 이후에 곧 허물어지고 말았던 듯하다. 그 터는 지금 가양동우체국 뒤편 가양취수장 부근 탑산 남쪽 기슭 중턱에 해당한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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