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19>개화사(開花寺)

  • 입력 2002년 8월 15일 18시 30분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 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겸재 당시 모습이다. 그때는 주룡산(駐龍山) 개화사(開花寺)라 했기 때문에 개화사로 그림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주룡산은 안산의 수리산과 인천의 소래산 줄기가 뻗어 나와 한강변에 솟구친 산으로 양천현아의 뒷산인 성산에서 보면 서북쪽에 위치한다.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 선생이라는 도인이 숨어 살며 수도하고 있었다. 그는 매해 9월 9일이 되면 동지들 두세 명과 함께 이 산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는 그 술 마시는 행사를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다 한다. 9월 9일 주룡산에서 술 마시기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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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주룡 선생은 이곳에서 천수를 다하고 돌아갔는데 그 ‘구일용산음’ 하던 터에 이상한 꽃이 피었다. 그래서 이 터에 절을 짓고 개화사라 하니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주룡산을 개화산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개화사에 관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이 영조 13년(1737)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이 절을 크게 중수한 사실을 그의 고손자인 송백옥(宋伯玉·1837∼1887), 송숙옥(宋叔玉·1841∼1923) 형제의 ‘중수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송인명은 24세(1713)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30세(1719)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과거시험 공부를 이 개화사에서 했다고 한다. 송인명은 영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탕평책 담당 재상이 돼 세도를 얻게 되자 젊은 시절 고생하며 공부하던 가난한 절 개화사를 잊지 않고 크게 시주하여 법당을 중수하고 불향답(佛享畓·불공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논)을 마련해 준다.

이로부터 개화사는 송인명 집안의 원찰(願刹)이 되어 대대로 이들의 시주와 보호를 받게 됐다.

이 그림이 영조 16년(1740)에 그려졌으니 개화사가 중수된 지 3년 뒤의 일이다. 그러니 막 중수를 끝마친 상태의 모습일 것이다.

주룡산 거의 상봉에 법당이 우뚝 솟아있고 그 법당 석축 아래에 3층 석탑이 그려져 있다. 석탑 오른쪽으로 요사채가 있는데 ‘ㄴ’자(字) 모양이라 아직 덜 지어진 듯하다. 이 그림보다 뒤에 그려진,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씨가 소장한 개화사 진경을 보면 이 집이 ‘ㄷ’자 구조로 돼 있어서 이때는 아직 다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절 아래에 초가집 세 채가 섶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 집들도 절의 부속건물이었던가 보다. 절 뒤로는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마당 아래로는 버드나무가 고목이 되어 숲을 이루며 겹울타리를 치고 있다. 아마 강바람을 막으려는 배려로 조성한 방풍림일 것이다.

버들 숲 아래로 층층의 다락논이 보이나 가을걷이가 끝난 듯 논은 모두 텅 비었다. 산자락 끝은 바로 한강변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데 모래사장에서 시작된 산길이 산골짜기를 따라 논과 산의 경계를 지으며 절로 오르고 있다.

왼쪽에 주룡산 최고봉이 있고, 거기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만들며 개화사를 3면에서 감싸고 강으로 내려왔다. 그러니 개화사에서는 한강 쪽으로만 시계가 열려있어 항상 한강을 내려다보고 그 건너 행주산성과 삼각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쌍돛배가 떠가는 한강물이 바로 주룡산 밑을 스쳐 지나고 있지만 지금 개화산 약사사는 한강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영조 16년(1740) 종이에 먹으로 그린 31.0×24.8㎝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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