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18>양천현아

  • 입력 2002년 8월 8일 18시 17분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현령으로 부임할 당시 양천현 관아의 모습이다. 양천읍지에 ‘동헌 종해헌(宗海軒)이 건좌손향(乾坐巽向·서북쪽에 앉아서 동남쪽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돼 있어 현아 전체의 좌향(坐向·명당이 틀고 앉은 방향)이 동남향이었을 것이다.

겸재는 이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서북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틀어 놓았다. 방향 감각까지 배려한 빈틈없는 사생 능력이다.

외삼문(外三門·관청이나 대갓집의 대문은 세개의 쪽문으로 되어 있어 삼문이라고 부름)과 내삼문이 이중으로 지어져서 관부의 위용을 자랑하니 백성은 이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외삼문 왼쪽으로는 육방(六房) 아전들의 집무소인 길청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줄행랑이 이어져 여러 용도의 집무실이 차려져 있을 듯하다.

내삼문은 외삼문보다 규모가 더 큰데 왼쪽으로 이어진 줄행랑 규모가 훨씬 커서 이 건물이 관곡(官穀·관청 소유의 곡식)의 보관장소인 읍창(邑倉)이었다는 기록을 증명해 준다. 외삼문과 내삼문이 네모진 담으로 연결된 것을 삼문의 오른쪽 끝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삼문 안 폐쇄된 공간은 아전들의 독무대였으리라. 당연히 지방행정의 대강은 이 삼문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에 이들의 전횡을 감시하고 억제하는 기구가 필요해 덕망있는 지방 선비들이 모여 여론을 대변하게 하니 그들이 모여 일하는 곳을 향청(鄕廳)이라 했다. 이 그림에서 그 향청 건물이 바로 외삼문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느티나무에 가려진 기와집이 그것이다. 이상적인 건물의 배치다.

내외 삼문을 지나면 동헌인 종해헌이 석축을 높이 쌓은 축대 위에 팔작집으로 우람하게 지어져 있다.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로 방이 꾸며진 독채 건물이다. 그 오른쪽에는 입구(口)자 형태의 내아(內衙·관사)가 있는데 정면 행랑채에서 시작된 담이 전체를 감싸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다 그리지 않고 관아에 깃들이기 시작하는 어둠으로 그 끝을 묻어 버렸다. 내아 앞에 일부만 표현된 건물은 군노와 사령들이 일을 보던 사령청 건물인 듯하다.

관아 전체가 텅 비어 사람 모습 하나 찾아볼 수 없고 어둠이 내리는 듯 거뭇거뭇 밤 기운이 종해헌과 내아 뒤편에서 몰려와 뒷산 배경을 그 속에 묻어버리고 있다. 따라서 건물들은 그 윤곽선만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되므로 굵은 필선으로 거칠게 이를 잡아냈다.

고목나무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할 때도 나무의 겉모습이 더욱 우람해지며 울창한 기운을 발산하는데 겸재는 해거름에 일어나는 이런 어둠의 조화를 세심하게 관찰했던 모양이다.

이 시간이면 출퇴근하는 관속들은 당연히 퇴청하고 관아에 남아서 수직(守直)할 사람들도 모두 제 처소에 들어갔으리라. 그래서 관아 전체가 텅 비었다. 겸재는 양천관아의 한적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아마 이런 시점의 현아 모습을 진경으로 표출해 냈을 것이다.

이곳은 현재 강서구 가양1동 239 일대인데 종해헌은 물론 그 부속건물 하나 남아있지 않고 연립주택과 개인주택이 가득 들어차 있다. 1977년까지는 종해헌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에 이곳 양천 일대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헐리고 연립주택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내에 남은 유일한 지방관아가 최근에 사라졌다니! 더구나 이곳은 화성(畵聖)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만 5년 동안 현령으로 재임하면서 그 천재성을 최고로 발휘하여 서울과 그 주변 한강 일대의 경치를 사생해낸 명화 제작의 산실이 아니던가!

1740년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1×26.9㎝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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