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의 적들<7>공짜]“돈내면 바보”… 얌체공화국

  • 입력 2002년 4월 7일 17시 33분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공짜 세태가 얼마나 만연돼 있는 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경로우대, 장애인우대 등과 같이 ‘선의의 무료’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나만 특혜를 받으면 되고 나에게만 이득이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심리가 문제다.

하지만 ‘세상에 진짜 공짜는 없다’고 했다. 공짜의 탈을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 있다’고 하지만 그 치즈도 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니 진짜 공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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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라면 뭐든 해∼’〓지난해 3월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결식을 치른 서울아산중앙병원의 관계자들은 ‘얌체 주차족’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영결식장으로 사용될 병원 주차장을 비우기 위해 며칠 동안 안내방송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차량이 거의 절반이나 매일 남아 있었던 것. 알고 보니 서울시내 종합병원 가운데 유일하게 무료로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지하철 이용 출퇴근자나 인근 주민, 단체 골퍼, 낚시꾼 등이 공짜 주차를 해 왔던 것이다. 결국 이들 차량을 견인한 뒤에야 영결식을 치를 수 있었던 병원측은 결국 올 4월1일부터 주차장을 유료화했다.

올 1월 대한항공이 발표한 한국 승객의 ‘꼴불견 행태 워스트 7’ 중 두 번째가 ‘어이 한잔 더 형’이었다. 여승무원에게 반말을 하며 불러대는 ‘어이 아가씨 형’ 다음으로 흔한 꼴불견이 바로 기내서비스 술이 공짜라고 만취할 때까지 마구 마셔대는 승객이었다.

세일과는 별도로 매출액을 높이려고 사은품과 경품을 경쟁적으로 내거는 대부분의 백화점 판촉행사도 실제로 보면 구매자의 공짜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실제로 현대백화점 천호점이 2월 한 달간 냉장냉동식품 매출을 분석한 결과 무료 시식행사를 한 주가 운영하지 않은 주의 매출에 비해 무려 7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 관계자는 고가의 공짜 경품(아파트, 자동차, 보석 등) 여부에 따라 전체 매출이 30∼40% 정도 차이가 난다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공짜심리를 악용한 범죄〓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은 ‘공짜 컴퓨터 광고’ 피해자들이 속출하자 ‘소비자 경보’를 발령했다. 또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인터넷 광고를 클릭하면 컴퓨터를 공짜로 주겠다고 꾀어 1050명으로부터 21억원을 가로챈 한 정보통신의 사장을 최근 구속했다.

금융감독원은 일부 컴퓨터학원이 2개월만 다니면 수강료 전액을 되돌려준다고 수강생을 모집한 뒤 수강료를 챙겨 달아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주의를 촉구했다. 금감원 조사결과 ‘학원비 공짜’라는 광고를 믿은 수강생은 2개월간 1200여명에 금전 피해가 16억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판단력이 흐린 노인들에게 처음엔 공짜라며 건강식품을 나눠주고는 나중에 언제 그랬느냐며 돈을 청구하는 사례와 공짜 휴대전화 피해사례도 여전하다.

이뿐만 아니다. 공짜 중국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을 중국으로 데려가서는 여권을 훔쳐 달아나는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짜 관객에 발목 잡혀…〓문화계에서는 ‘공짜표(초대권)’를 없앤 극히 일부 단체를 제외하면 공짜표는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할 ‘관례’로 여긴다.

하나의 연극이 막을 올릴 경우 ‘괜찮은 작품’이면 30∼40%, 작품성이 떨어지면 60∼70%까지 초대권을 남발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부는 작품의 인기도를 관객수로 과시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회피할 수 없는 공짜표 관객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다.

관계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고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공짜표를 더 요구한다”고 털어놓는다. 표를 사지 않고 공짜표를 받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대형 공연장인 LG아트센터는 지금은 직원들조차 돈을 내고 관람하는 풍토가 정착됐지만 개관 초기 초대권을 없애면서 ‘큰 저항’을 받는 진통을 겪기도했다.

▽기본을 흔드는 공짜심리〓흔히 선거때 뿌려지는 돈은 ‘눈먼 돈’이라 해서 ‘못받은 사람이 바보’라고 할 정도. 선거때면 후보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요구하며 손을 내미는 유권자들의 행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역 주민을 모아놓고 후보를 부르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 각종 친목단체들은 선거철만 되면 행락비용 지원을 공공연하게 요구한다. 잘사는 동네라고 예외는 아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단지 부녀회 상당수가 선거철이면 ‘여성표는 투표율이 높다’는 것을 무기로 후보들에게 거액의 금품을 요구한 사례가 끊이질 않았다.

비단 어른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중학생 아들을 둔 유모씨(43·여·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아들이 반장으로 뽑힌 뒤 ‘반장이 되고도 왜 아무 것도 없느냐’는 말에 시달린 끝에 반 급우 모두에게 음료수와 햄버거를 돌리는 것은 물론 친한 급우는 ‘별도 대접’을 하고서야 압력이 끝나더라”며 “공짜 세태가 아이들까지 물들게 한 것을 보며 너무 씁쓸했다”고 말했다.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전문가 진단▼

공짜 심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연세대 의대(정신과) 민성길(閔聖吉)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공짜를 당연시하고 탐닉하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은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진단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안현숙(安賢淑) 상담팀장은 “공짜상술에 속은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구제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짜인줄 알고 받은 물품에 대한 대금청구서가 날아오거나 신용카드 결제가 진행중이라면판매업체측에 내용증명 우편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신용카드사를 상대로 카드결제 중지를 요청하는 항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 만약 이런 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소보원은 피해자를 대신해 판매업체의 위법사실을 사법기관(검찰, 경찰)에 고발하는 등 피해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안 팀장은 “이미 결제된 금액에 대해서는 항변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피해가 발생한 즉시 상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불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법적인 보호장치가 있지만 인지능력이 떨어져 공짜상술에 취약한 노인들은 단지 성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보호장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초대권 없는 공연장’으로 유명한 LG아트센터 최정휘(崔正煇) 홍보 마케팅담당자는 “훌륭한 공연이란 공연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관객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관객이 공짜 손님인가, 유료 관객인가에 따라 공연의 분위기와 수준은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초대권이 남발될수록 입장료는 비싸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초대권 없는 공연은 결국 관객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강승수(姜承秀) 대장은 “이미 잘 알려진 공짜상술에 속는 피해사례가 끊이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없다”며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물품이나 서비스는 100% 사기”라고 단언했다.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외국인이 본 ‘공짜문화’▼

“미국 프로농구에도 초청 프로그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공짜 표와는 거리가 멉니다.”

6년째 한국농구연맹에서 심판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제시 톰슨(66)은 한국의 프로스포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홍보 티켓’과 미국프로농구(NBA)의 초청 프로그램은 확실히 구별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홍보 티켓은 일반인들 사이에 ‘공짜 표’라는 인식이 강한 반면, 미국의 경우는 각 구단이 주로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사업의 하나로 초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을 뿐 그 외는 무료 티켓이 없다는 것.

그는 “다만 전국 규모의 프로 스포츠가 아닌 지역별로 운영되고 있는 마이너 스포츠의 경우는 간혹 공짜 표를 구할 수도 있지만 역시 한국만큼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초청 프로그램의 예를 들어 “공짜라고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공짜도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25년 경력의 국제 심판인 톰슨 심판부장은 미국에서 NBA 심판으로 10년 간 활약하다 97년부터 한국에서 심판 생활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머물기도 해 한국과는 인연이 꽤 깊은 편이다.

그는 “한국의 공연, 운동 경기 등에 나돌고 있는 공짜 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한국인의 심리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농구 경기에서도 유독 한국 선수들이 경기 중 심판을 속여 파울을 얻어내려는 동작을 많이 하는데 이도 그런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그 경우 당장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반복되면 결국 본인에게 불리하게 된다”고 농구 경기와 한국 사회를 연관지어 꼬집었다.

최근 가벼운 교통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는 톰슨 부장은 교통사고에서 피해 경중을 떠나 무조건 입원해 보상금을 타내는 일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자주 보게 되는 식사, 술 대접 등의 향응 제공 등을 공짜 문화와 연관짓기도 했다.

그는 또 받는 쪽에서는 공짜라서 흔하게 여기고, 주는 쪽에서는 흔해서 공짜 표를 더 돌리게 되는 ‘공짜 문화의 악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홍보 티켓을 돌려도 실제로 경기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짜 표의 80∼90% 정도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짜니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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