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의 적들<3>]“주면 통한다” 뒷돈 사회

  • 입력 2002년 4월 2일 18시 54분


떡값, 목욕비, 기름값, 회식비…. 촌지(寸志)가 오고 갈 때 흔히 붙는 말들이다.

안풀리는 일을 잘 되게 해 달라며, 우리 애 잘 봐달라며, 표 구해 달라며, 자리 예약해 달라며, 도와줘 고맙다며 주고 받는 촌지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관행화 된 지 오래다.

액수가 적고 ‘누이 좋고 매부 좋기’ 때문에 큰 죄의식 없이 주고 받아온 이런 촌지 관행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보이지 않게 병들어 왔다. 정상적인 일 처리가 뒷전으로 밀리는 등 페어플레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이다.

촌지는 한때 ‘미덕’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페어플레이의 적’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공정사회와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촌지 관행을 하루빨리 도려내야 한다는 게 뜻 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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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촌지〓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의사, 법조인, 기업체 임원 등 상류층 학부모들이 매달 직업군별로 정기 모임을 갖고 교사에게 촌지를 건넨다.

남편이 의사인 박모씨(39)는 “의사 학부모들이 매월 모임을 갖고 한 명당 20만∼30만원의 촌지를 걷어 교사에게 전달한다”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전달이 수월하고 액수도 커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학교 촌지는 대표적인 ‘방어적’ 성격의 촌지. 혜택을 보자는 것보다는 주지 않아 받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J씨(32)는 “학기 초와 스승의날, 추석 등 명절에 각각 20만원씩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박경양(朴慶陽) 부회장은 “학교 촌지에서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의미는 오래 전에 퇴색했다”며 “원칙에 따라 일이 처리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회문화가 학교 촌지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관공서 급행료〓남보다 먼저 서류를 발급받거나 일 처리를 원활하게 하는 등 혜택을 누리기 위한 ‘적극적’ 성격의 촌지에 해당한다.

법원이나 검찰, 등기소에서 기록을 복사하거나 서류를 낼 때 급행료를 건네는 것은 오랜 관행. 98년 1월 변호사개혁모임이 발표한 법조계의 급행료 실태에 따르면 법원과 검찰 직원이 민원을 처리하면서 받는 급행료는 한 번에 5000∼30만원 정도로 조사됐다.

대형 종합병원에서는 △응급실에서의 빠른 환자 수속 △병실 구하기 △수술 일정 앞당기기 △유명 의사에게 외래진료 빨리 받기 등을 위해 급행료가 오간다.

올 초 스키장에서 무릎을 다친 이모씨(30·회사원)는 급행료 덕을 톡톡히 봤다. 서울 강남의 한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입원 결정이 났고 유명 의사에게 수술도 받을 수 있었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이씨의 삼촌이 병원 유관기관의 고위직 공무원인 데다 상당한 액수의 급행료까지 받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고 털어놨다.

반면 지난해 말 전남 순천에서 뇌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72)를 모시고 이 병원에 온 김모씨(46)는 급행료를 주지 않아서인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응급실에 도착한 뒤 6시간 동안 침상을 얻지 못해 어머니가 응급실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입원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7시간.

김씨는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은 치료조차 받기 힘들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각종 청탁용 촌지〓치과의사 이모씨(55·서울 강남구 신사동)는 지난해 10월 소득세를 덜 내기 위해 세무사를 통해 국세청 직원에게 500만원을 건네고 세금 감면을 청탁했다.

해당 국세청 직원의 비리가 검찰에 적발돼 로비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세금 감면을 둘러싼 세무 공무원과 업자간의 금품 거래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사채업자 김모씨(32·서울 강남구 포이동)는 부가가치세 신고를 할 때면 세무 공무원과의 식사자리를 마련해 30만∼4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선물한다. 김씨는 “이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신고한 매출액이 별 탈 없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모 대학 행정학과 대학원생 B씨(32)는 박사학위 심사를 받으면서 관례에 따라 심사 때마다 심사위원들에게 300만원을 상납했다. 3차례 심사를 받으면서 900만원이 들었고 심사가 끝난 뒤에도 룸살롱 접대와 지도교수 선물 비용으로 별도로 수백만원을 썼다.

공무원들이 인사 이동으로 자리를 옮길 때 주는 ‘전별금’도 촌지의 일종.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이영란 간사는 “전별금은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 바치는 일종의 ‘잠재적 뇌물’이라며 특히 법조계의 경우 전관예우를 받을 사람한테 돈을 줘서 미리 보험에 들어두자는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언론계에서도 최근 기업체나 영화제작 업체의 홍보성 기사를 써주고 돈을 받은 일부 기자들이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촌지 만연의 원인〓시사평론가 유시민씨(柳時敏)는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성향과 ‘완장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유씨는 “소수가 촌지를 제공함으로써 재량권을 가진, ‘완장 찬’ 사람으로부터 특혜를 얻으면 만인은 촌지를 줘야한다는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서정우(徐正宇)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가 촌지 등 부정(不正)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 문제”라며 “시민 스스로 파수꾼 역할을 해야만 이런 부정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 훈기자dreamland@donga.com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전문가들 “이렇게 풀자”▼

전문가들은 촌지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의 의식개혁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적은 금액의 촌지나 급행료를 주고받더라도 처벌받도록 하고 아울러 공익을 위한 고발정신이 존중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60, 70년대까지만 해도 간단한 서류 하나를 떼려고 해도 급행료를 물어야 했지요. 각종 규제가 심하고 공무원들의 해석에 따라 될 일도 안 되고 안될 일도 되는 것이 많은 지금도 여전히 민원인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약’을 쓸 수밖에 없는 것같아요.”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부의장 효림(曉林) 스님은 촌지와 급행료 관행 척결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쓰게 된 ‘약’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악’이 되고 결국에는 나에게 큰 피해로 돌아오게 되지요. 세상을 바꾸는 힘은 반드시 큰 일을 실천하는 것에서만 생기지는 않아요.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닌 우리 소시민의 작은 실천에 있어요. 우리 모두가 ‘작은 일’부터 스스로 실천해 나갈 때 우리 사회는 ‘바른 큰 길’과 통하게 될 겁니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윤용(尹溶) 대표는 “촌지나 급행료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서로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기 힘든 실정”이라며 “공익을 위한 고발정신이 존중되도록 내부고발자에 대한 신변을 보호해 주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또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촌지 관행을 척결하기 위해 도덕 관습 의식 등 의식개혁만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이와 함께 상호간 비밀고발이 보장되는 실질적인 제도 마련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부패국민연대 안태원(安泰原) 홍보국장은 “촌지나 급행료는 일이 순서나 원칙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일 처리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며 “비록 1만∼2만원 정도의 적은 금액일지라도 쌓이면 큰 뇌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촌지나 급행료에 대해서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외국인이 본 한국…로버트 번스▼

8년째 한국에서 사는 캐나다인 로버트 번스는 지금껏 누구에게 촌지를 줘 보거나 요구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다른 외국인들의 경험이나 언론 보도를 통해 한국의 ‘촌지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비자 연장신청을 하러 담당 기관에 찾아가면 몇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죠. 그 때 친구들 사이에서는 돈을 얼마 집어주면 빨리 처리해 준다더라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실제 그렇게 해서 손쉽게 비자 연장을 한 친구도 있었죠.”

번스씨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에서 언어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94년 말 한국에 왔다. 96년부터 올 1월까지 항공대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3월 KDI 정책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2년 전부터 참여연대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기 위해 지원자들이 얼마간 돈을 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수직을 돈으로 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번스씨는 또 대학원생들이 석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에게 심사비 등 돈을 건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학위를 돈으로 산다는 인식을 주기 쉽죠. 이런 현상은 한국 대학들이 자기 학교 졸업생들을 대부분 교수로 채용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적절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최근 논란이 됐던 대학의 기여입학제도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촌지문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번스씨는 주장했다.

“기여입학제를 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학력을 우선으로 봅니다. 그 다음에 학생의 부모 등이 그 대학을 졸업했거나 큰돈을 기부한 적이 있는가를 보죠. 한국에서 논란이 된 기여입학제는 돈으로 입학증을 팔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훗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입니다.”

번스씨는 “한국인들은 촌지가 관행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범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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