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네트워크]'동문 엔젤펀드' 만든 MIT 젊은 사자들

  • 입력 2002년 2월 28일 14시 22분


MIT본관 건물. 흔히 'MIT돔'으로 불린다
MIT본관 건물. 흔히 'MIT돔'으로 불린다
미국 명문대 출신의 MBA들이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출신 경영대학원별 한국동문회가 주목받는 네트워크로 등장하고 있다. 현재 미국 MBA 별 한국동문회 중 회원 300여명의 펜실베이니어대 와튼스쿨이 가장 규모가 크며 스탠퍼드대, 시카고대 동문회도 활동이 활발하다. 이 중 색다른 활동을 펼치는 곳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슬론(Sloan)스쿨 출신들이 만든 ‘MIT 매니지먼트 클럽’이다.

이들은 지난해 십시일반으로 출자해 ‘MIT슬론 엔젤펀드’를 만든 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투자할 벤처기업을 찾아나서고 있다. MBA 동문회에서 엔젤투자 펀드를 만들기는 MIT가 처음. 동문회비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펀드 결성 의도는 약간은 딴 데 있었다.

58년 MIT 슬론스쿨에 입학해 현재 슬론스쿨 한국동문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해형 나라기획회장은 “‘젊은 라이언’(조 회장은 후배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이 투자공동체를 통해 ‘기업가 정신’을 구현해 보자는 뜻에서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즉 각자 경영현장에서 슬론스쿨이 가르친 ‘기업가 정신’을 잊지 말고 살자는 의도라는 것.

MIT 매니지먼트 클럽 총무인 JCMBA 정병찬 사장은 “기존의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는 것이 MIT의 기업가 정신”이라며 “슬론스쿨에서는 매년 재학생을 대상으로 상금 5만달러를 내걸고 ‘50K’라는 벤처기업 사업 아이템 경연대회를 열 정도로 어느 MBA보다 창업에 의욕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펀드를 통해 MIT 슬론스쿨 한국 동문들은 기업 평가를 통해 투자 대상기업을 함께 정하고 실제 투자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케이스 발표 등을 통해 공유하게 된다. 1호 펀드가 성공할 경우 제2호, 제3호의 펀드를 잇달아 만들 구상까지 갖고 있다. 슬론스쿨 교수였던 서울대 경영대 주우진 교수가 MIT 슬론 엔젤펀드의 업무집행 조합원으로 일하고 있다.

조해형 나라기획 회장-정몽준 월드컵조직위원장-고정석 일신창업투자 사장

슬론스쿨의 동문들은 수업과정에서의 ‘기업가정신’ 강조 때문인지 실제로 벤처 관련 분야에 다수 포진해 있다. 김형순 ㈜로커스 사장, 고정석 일신창업투자 사장, 김지훈 IMM투자자문 사장, 강성욱 컴팩코리아 사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벤처업계와 아무래도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오진석 골드만삭스 한국지사장도 슬론스쿨 출신이며 시사영어사 민선식 사장, 농심켈로그 신현수 사장은 전통형의 회사를 슬론의 정신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동문이다.

이 중 가장 알려진 벤처 스타는 역시 김형순 사장이다.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국내 1세대 벤처 기업인들이 여럿 퇴진했지만 김 사장은 오히려 종합엔터테인먼트업체인 싸이더스 등을 통해 사업 영역을 탄탄하게 넓혀 가고 있다. 그는 90년에 조 회장과 함께 슬론스쿨 동문회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김 사장은 중요한 결정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는 83년 9월 MIT 슬론스쿨에서의 첫날을 떠올리곤 한다. 첫날 강단에 섰던 교수는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정확하게 22초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CEO로서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부터 엄청난 양의 과제가 떨어졌고 실제 그가 배운 것은 강의내용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던져졌을 때 이를 헤쳐나가는 ‘방법’이었다.

김형순 (주)로커스 사장-민선식 시사영어사 사장

김 사장은 “첫날 강의실 창문 너머로 찰스강과 그 위의 보트를 보며 낭만적인 유학생활을 꿈꾸었지만 슬론 스쿨 2년 동안 결국 단 한번도 찰스강을 배 저어 건너질 못했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벤처에 몸 담고 있는 동문들은 학교 시절부터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지내온 사이다. 80년대에는 슬론스쿨에 1년에 1, 2명만 입학했고 대부분 83∼89년 무렵 함께 학교를 다녀 부인과 자녀들도 자기들끼리 모임을 가질 정도로 친하다. 슬론스쿨 졸업후 서로 다른 지역에 있을 때는 불쑥불쑥 사전통보 없이 찾아가곤 한 에피소드를 한두개쯤은 공유하고 있다.

벤처업계에서는 김형순 사장과 강성욱 사장이 거의 매일 통화하는 사이다. 또 고정석 일신창투 사장은 김 사장과 자주 벤처관련 세미나에 동반 등장한다. 서로 패널로 추천하기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사위인 현대자동차 정태영 전무도 이때 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 절친한 사이다.

강성욱 컴팩코리아 사장-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주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이들이 ‘젊은 라이언’이라면 조해형 회장, 정몽준 월드컵조직위원장과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든든한 선배들이다. 조 회장은 쌍용그룹 창업자인 고 김성곤 회장의 맏사위로 ㈜쌍용 등 쌍용 계열사의 대표이사를 역임하면서 정주영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과도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78년 정주영 회장이 조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몽준 위원장의 슬론스쿨 입학 추천서를 부탁했고 그해 정몽준 위원장은 조 회장의 학교 후배가 됐다. 윤종용 부회장은 88년 정식 MBA과정이 아니라 1년짜리 단기 최고위 과정을 거쳤지만 부회장을 맡기 전까진 2개월에 한번씩 열리는 동문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컴팩코리아 강 사장은 “회원이 80여명밖에 되지 않아 연령층이 다양한 데도 격의가 없다”고 말했다. 시사영어사 민 사장은 “두 달에 한 번 있는 세미나에서는 각계 동문들이 경제계와 세상 돌아가는 움직임을 큰 틀에서 보여줘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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