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교수 이미지로 보는 세상]좋은 패러디, 나쁜 패러디

  • 입력 2001년 9월 4일 18시 37분


패러디(parody)는 그 어원상 노래(ode)를 따라(para)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모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패러디한 ‘개구리들과 쥐들의 전쟁’이라는 작품이 그리스 당대에 등장했을 만큼 패러디의 역사는 유구하다.

어원에서도 드러나듯이, 패러디의 기본은 특정 원작을 모방하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반복해 모방하지는 않는다. 원작의 형식이나 내용을 다소 변형시켜 모방한다. 우스꽝스럽게, 슬프게, 무섭게 등 다양한 느낌이 나게끔 변형시킬 수 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예로 들자. 매끈한 백색 여인이 고급스러운 머리띠와 팔찌만을 걸치고 옷은 벗은 채 옆으로 드러누워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애완견 한 마리가 새근새근 잠을 잔다.

패러디를 하자. 금팔찌 대신 길거리 자판에서 헐값에 싼 놋쇠 팔찌로 치장해주고 보석 머리띠 대신 시든 꽃송이를 달아주면 어떨까. 교태 어린 눈매를 눈물 어린 눈매로 변형시키면 어떨까. 잠에 빠져 있는 자그마한 애완견 대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거품을 물며 여인에게 짖어대는 도사견을 놓아두면 어떨까. 벌거벗은 여인을 가슴털이 숭숭한 벌거벗은 남자로 변형시키면 어떨까.

각각의 변형마다 다양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정도의 느낌을 산출하는 데 머무는 패러디도 있지만, 종종 또 다른 효과가 산출되기도 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놋쇠 팔찌와 꽃송이로 패러디한 작품은 마네의 ‘올림피아’이다. 마네를 통해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파리의 싸구려 매춘부’로 전락했다. 우리는 비너스를 보며 그녀의 순결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런 찬양의 뒤에 실제로 도사리고 있는 것은 육체적 욕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비너스 대신 매춘부를 그려 놓는 것이 덜 위선적이지 않은가?

이렇듯, 마네의 패러디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는 남성적 시선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산출해 낸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패러디는 기존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산출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비판적 의식을 통해 패러디는 기존 문화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는 생산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패러디가 오늘날 특히 번성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물감과 붓으로 패러디하는 일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패러디하는 일이 훨씬 용이하다. 두 번째 이유는 모더니즘적 ‘독창성의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의 영향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선언은 모방에 대한 검열을 약화시킨다.

패러디가 번성하다보니 부작용이 뒤따른다. 가볍게 웃자고 만든 패러디가 원작자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기도 한다. 원작의 유명세를 이용해 센세이셔널한 주목을 받자고 만든 패러디가 문화의 가벼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법의 칼날이 그런 모욕감과 부추김을 제거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문화를 위해 발전적인 일은 좋은 패러디가 많이 창작되어 나쁜 패러디를 몰아 내는 일이다. 원작을 창작할 때보다 더 큰 고민과 열정의 땀으로 얼룩진 패러디, 그런 패러디만이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디지털 문화의 대통령들’을 지금 여기서 탄생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jinyupk@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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