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교수 이미지로보는 세상]엽기가수,엽기토끼,엽기녀

  • 입력 2001년 8월 7일 18시 38분


‘엽기적인 그녀’, ‘엽기 토끼’, ‘엽기 가수 싸이의 생쇼’ 등 요즈음 엽기가 유행이다. 변태적이고 기이한 것에 대한 탐닉을 뜻하는 엽기라는 말이 이렇듯 발랄한 붐을 일으키는 문화의 전례가 있었을까.

1917년 미술가 뒤샹은 전시장에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구입해 물구나무 세워 놓았다. 그리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후, 그 소변기가 예술작품임을 천연덕스럽게 선언했다. 엽기적이다. 그런데, 뒤샹의 엽기성은 그 당시의 예술적 관례에 대한 중요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었다.

당시의 예술적 관례는 이른바 모더니즘적인 것이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어로 요약되는 이 관례는 예술이 지니는 고유한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예술로부터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외부 내용들을 배제시켜 나갔다. 이런 움직임은 순수한 형식만을 남겨 두려는 일단의 추상예술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자율성에 대한 추구는 한편으로는 예술의 독립성을 강화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이 일상적 세계로부터 고립돼 엘리트화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만지지 마시오’라고 쓰여진 굵은 빨간 띠, 우아한 조명, 밀폐된 공간, 침묵. 이런 미술관에 전시된 추상 미술 앞에서 일반인들이 느끼는 당혹감 속에는 예술과 일상적 삶 사이의 단절이 배어 있었다. 뒤샹의 ‘샘’은 이런 단절에 대한 도전이었다. 일상의 저 낮은 곳에 위치한 소변기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뒤샹은 일상의 세계와는 분리된 고상한 그 무엇만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모더니즘적 관례에 항변했다.

이런 도전과 항변은 당연히 반발을 샀다. 제작된 직후 뒤샹의 ‘샘’은 미술관에서의 전시가 거부됐다. 뒤샹의 ‘샘’이 전시될 경우, 말똥을 발라 놓은 캔버스도 전시를 해야 하는 사태가 올 것이라는 비판도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얼마 되지 않아 뒤샹의 ‘샘’은 현대 예술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미술관의 중심에 모셔졌다.

모더니즘적 관례에 저항하던 뒤샹의 작품이 모더니즘적 관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의 중심에 서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뒤샹적 역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더욱 더 엽기적이 된다. 똥을 담은 통조림 깡통, 오줌으로 코팅된 예수의 초상, 피로 물든 생리대 시리즈 등. 근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엽기성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며 기존의 관례에 저항한다.

그러나, 제도적 관례가 블랙홀과 같은 힘을 유지할 때가 있다. 극단의 엽기성까지도 흡수해 관례에 대한 비판적 정신을 여과해 버린 후 독창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걸작으로 재포장해낸다. 뒤샹 이후의 많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도 결국은 뒤샹적 역설을 되풀이하며 현대 미술의 성좌에 자리한다.

이제 엽기성은 대중문화로까지 확산되며 히트 영화, 히트 장난감, 히트 가요의 탄생에 기여하고 있다. ‘관례적 정상(正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수정할 가능성을 엽기적 도전정신이 지닐 수도 있지만, 오늘날 유행하는 엽기 속에는 엽기마저도 숭배화, 상품화하려는 시장의 관례적 경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jinyupk@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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