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사람들]'작은 거인' 여성의전화 이화영씨

  • 입력 2000년 12월 26일 18시 36분


“이제는 사이버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져보려구요.”

본인 스스로 말해놓고도 ‘사이버’란 말이 민망한지 수줍게 웃는 그녀. 바로 서울여성의전화 인권홍보부에서 일하는, 아직은 신참 간사인 25살 이화영씨다.

사이버여성운동이란 말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화영씨에게 생소했던 언어.

“올 4월초부터 여성의 전화에서 일했어요. 나름대로 홈페이지 관리작업을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낼 수도 있고 어떤 문제를 여론화하기 쉽다는 걸 알게 되었죠. 아직 제 컴퓨터 실력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죠.”

여성의 전화에서 이씨가 주로 하고 있는 일은 여성인권과 관련된 문제들을 상담하고 언론 등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며 피해여성을 대신해서 법에 호소하는 일 등이다.

이 일들만 해도 왜소한 체구의 이씨에게는 넘쳐 보이는데 사이버여성인권운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니 일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이 좋아 보였다.

지금 이씨가 매달리고 있는 일은 지난 4월 평소 흉기로 위협하며잦은 구타를 일삼는 남편을 살해한 한 여성의 법적대응 관련 업무. 이 사건과 관련해 여성의 전화가 주장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것은 틀림없는 정당방위라는 것.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격려전화도 많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셔서 피해여성이 힘을 얻고 있어요. 저도 그럴 때 보람을 많이 느끼구요.”

여성이라면 한번은 꿈꿔보지만 실제로 뛰어들긴 어려운 여성운동에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졌다.

“4학년때 총여학생회장을 맡아서 일을 했었어요.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다 보니 운동권내에도 여성차별이 곳곳에 묻어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곳 여성의 전화 회원으로 가입했단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서 이씨가 일하는 것은 여성의 전화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2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꽤 이름있는 시민단체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적지않은 실망감을 갖게 됐다는 것.

“남성중심의 문화가 너무나도 강한 곳이었어요. 나름대로 전공을 살려 들어간 곳이었는데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기는 커녕 제가 1년반 동안 했던 일은 고작 커피타기, 복사하기 등이었어요. 결국 박차고 나왔죠.”

아직도 시민단체에 남성위주의 운동문화가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

이말을 듣자 얼마 전 ‘운동사회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가 진보진영내 성폭력사례를 실명공개한 것이 떠올라 의견을 물어보니 답변을 꺼렸다. 그만큼 민감한 문제란 것이 느껴졌다.

“어쨌든 운동권내에서 남성활동가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요.”

더이상의 의견을 말하기는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지만 그 짧은 말속에도 확고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렇게 일할 때는 자신감 있는 모습의 이씨지만 쉴 때는 남자친구와 영화보러 다니기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보통처녀이다.

"최근에 본 영화요? '언브레이커블'봤어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재밌던데요?"

앞으로 여성인권을 위해서 오프라인,온라인 마다않고 운동할 것이라는 이씨. 문득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힘이 되줄 큰 빛을 보는 듯 했다.

이희정/동아닷컴 기자 huib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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