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士칼럼]심윤종/사랑의 매가 사회를 지킨다

  • 입력 2000년 9월 28일 18시 49분


한 중학생이 70대 노인을 지하철 계단에서 밀어 뜨려 사망에 이르게 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얼마 전에 발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점점 자주 일어나고 있고, 또 그런 사회적 패륜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이 어느새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두 종류가 있다.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대등한 수평적 관계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이 일정한 서열적 질서를 이루는 수직적 관계라고 하겠다. 모든 사회에는 이 같은 두 종류의 관계가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교직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문화를 구성하게 된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학교와 회사, 나아가 사회 전체에 이르는 다양한 관계의 단위들에서 이 같은 횡적, 종적 관계가 얽히고 설키면서 사회질서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사회에 따라 형식적 대등성이 강조되느냐 서열적 질서에 의미를 두느냐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인륜붕괴 보여준 노인폭행▼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인의(仁義)로써 대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같은 상호존중의 인의적 관계들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 담긴 최소한의 인륜적 의미마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사제관계를 떠받쳐 온 선생의 교육권이 이제는 학생들의 대등한 인격적 주장에 밀려나고 있다. 교육적 체벌이 폭력행위로 신고되는 세태가 그것을 방증한다. 요지부동과도 같던 사제관계마저 이런 마당에 지하철의 경로석을 언감생심 노인들이 차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필자는 이 모든 권위 붕괴 현상의 근저에는 가정 내에서 최소한의 인륜적 훈육(訓育)을 위한 서열적 관계마저 붕괴된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가르침과 보호 아래 완성을 향해 가는 인격적 미완의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기계적 평등주의와 수요자 중심주의가 수용되면서 미완의 인격체에게 법적, 사회적 완전성을 부여하는 미완의 제도화, 사회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가정에서는 주관적으로만 성숙한 ‘왕자’와 ‘공주’들이 쏟아져 나오고, 방송에서는 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인격적 독자성과 완결성을 주장하는 ‘반항아들’이 자유교육의 명분 아래 조명을 받고 있다. 엄부(嚴父)와 자모(慈母)의 조화로운 교육기능은 빼앗긴 채 우리 부모들은 오로지 아이들의 무절제한 욕구를 해결해주는 물질적 해결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니 부모들의 주머니가 여의치 못해 욕구 해결사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아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하게 된다. 전통과 문화, 삶의 지혜를 이어주는 최소한의 서열적 훈육관계마저 배척 당하고 있으니 가정 안에 남는 것은 오로지 부모의 혈연적 집착과 아이들의 무절제한 욕구 주장이 충돌하는 현상뿐인 것이다.

경로라는 전통적 가치의 권리를 요구한 노인의 죽음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비 온 뒤 죽순처럼 인륜적 서열관계마저 뚫고 나오는 갖가지 패륜적 행태들은 이처럼 가정 내 수직적 질서가 붕괴된 여파가 사회적 관계 전반의 뿌리를 뒤흔드는데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설익은 과일처럼 익어가야 할 미완의 존재들이 지금 인격의 평등성과 주관적 완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왕자’와 ‘공주’들의 반란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교육 좀 더 엄해져야▼

그 옛날 철없는 동궁의 행패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군주였다. 경로와 공경의 가치가 무너진 지금 우리의 익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들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할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가정의 부모들이 물질적 원조자의 기능을 뛰어넘어 아이들의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직접 점검하고 참여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왕자’와 ‘공주’들의 반란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을 것인지, 아니면 사랑과 가르침의 매를 들고 교양과 품위와 사회성을 갖춘 시민으로 키워낼 것인지, 엄하되 태연하고 부드럽되 절제하는 엄이태 화이절(嚴而泰 和而節)의 가르침을 이제 부모들이 실천해야 할 때다.

심윤종(성균관대 총장·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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