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창의 NGO이야기]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역사는 몇 년?

  • 입력 2000년 8월 16일 10시 31분


1.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기점 찾기

흔히들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경실련의 창립을 그 기점으로 이야기합니다. 경실련이 1989년 7월에 창립되었으므로 만 10년이 조금 지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당장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지난 번 강의에서 분명히 YMCA도 시민단체라고 말했는 데 YMCA는 그 역사가 100년에 이르는 데 이게 웬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YMCA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전국에 60여개가 넘는 지부가 있는 거대조직이기도 합니다. 또 1980년대 전두환독재정권 시절에는 YMCA내의 각종 소그룹 모임이나 교육프로그램이 당시 재야운동이나 민중운동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나 과학기술자운동의 모태가 되는 모임들이 이 시절 YMCA에 있었고 지역Y는 노동운동의 교육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잘 알려진 사회학자들, 예컨대 참여연대의 정책위원장을 지내고 있는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같은 분들이 시민운동의 역사를 10년으로 볼까요?

재야운동이나 민중운동과 구분하여 시민운동 혹은 신사회운동으로 부르는 흐름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입니다.(시민사회와 시민운동, 김호기.유팔무, 한울, 1995/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운동, 조희연, 당대, 1999 등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보다 다원화되고 민주화되어 가는 시기에 나타난 운동의 흐름이라는 거지요.

경실련을 창립한 서경석목사(현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는 1992년 기독교사상이라는 잡지에서 시민운동을 설명하면서 재야운동, 민중운동과 구별하여 이렇게 분별정립한 적이 있습니다.크게 3가지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합법적이라는 것과 비폭력적이라는 것, 그리고 대안중심의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것처럼 시민운동의 특징을 잘 설명한 말도 없었습니다. 재야민중운동은 불법도 불사했고, 폭력도 사용했으며, 독재타도 혹은 민중민주주의 같은 강령적 구호로 운동의 중요한 근거를 삼았다고 보였으니까요.

이같은 구분은 민중운동이 1987년 이후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긴 했지만 마치 민중운동은 잘못된 것인 양 하는 정서가 있는 것이어서-또 실제 민중운동과 거리를 두었고-시민운동은 재야운동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보여졌지요.

이게 두고두고 경실련이 재야나 민중운동 세력과 가까울 수 없도록 만든 부메랑이 됩니다. 재야도 민중운동도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 지 모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하여튼 그러면 왜 경실련의 창립을 기점으로 보느냐? 학문적으로는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시대적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근거라면 또 하나는 운동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YMCA는 비록 재야나 민중운동과의 관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시민운동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전현직 YMCA출신들은 과거 기독교의 재야운동에서 훌륭하게 일하시던 분들 입니다- YMCA는 사회개혁이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경실련은 아주 분명하게 사회개혁을 자신의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이름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니까요.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체제가 당시 경실련의 주요 전문가들이 생각하던 사회체제였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의 우리 시민운동의 역사를 경실련 창립을 그 기점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2. 시민운동 영역 만들기

경실련이 만들어지고 나서 몇 년은 지금과 같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토지공개념이나 금융실명제 주장, 주택임대차보호법 문제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발언하고 그 발언의 합리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넓혀갔지만 정부는 대화조차 잘 하지 않았습니다.

시민운동이 일정하게 자기영역을 만들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은 몇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활동입니다.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을 통해 군부대내의 투표제도가 바뀌는 성과를 얻어내면서 시민단체가 선거과정에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성과를 내었고 연대기구로서 시민운동을 영역화하는 성과를 낳았습니다.

또 국외적으로는 92년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는 국내에 환경운동이라는 영역을 새롭게 부각시켰습니다. 물론 국제연대의 중요성까지.

공선협활동에 이어 한국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 등 연대기구의 활동은 시민운동을 경실련이나 환경련 등의 몇몇 큰 단체만의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시민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민운동권이라고 할만한 영역의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리우환경회의 이후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의 활동강화,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의 창립 등은 시민운동의 영역을 넓혀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부분 92년경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앗! 시민운동이 온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이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김영삼정부 시절에 있었던 한약분쟁에 대한 경실련의 중재활동과 금융실명제 실시부터 일 것입니다.

금융실명제는 경실련이 창립 초 부동산투기문제로 정부와 싸우고 있을 때부터 각종 정경유착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성을 강조해 온 것이어서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했을 때 자연스레 경실련이 주목받았습니다.

더구나 한약분쟁의 경우 보사부가 아예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시민단체가 중재를 이루어 놓음으로써 시민운동의 위상을 높여 놓았습니다.

그 해 경실련은 시사저널 조사 한국사회의 영향력 순위에서 '경실련, 군보다 세다'는 제목으로 상위에 오름으로써 사회가 시민운동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시민단체는 시민이 신뢰할만한 집단에서 매번 상위에 오르게 되고 각종 현안에서 시민단체의 발언은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지방자치의 실시였습니다.

처음으로 치뤄진 94년의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였고 시민들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도시마다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경실련의 지역조직도 이 당시 급속하게 늘어났습니다.

지방자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통단체들도 주목받았습니다. 녹색교통운동, 도시연대 등이 모두 90년대 중반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 단체들입니다.

90년대 중반들어서 전문성이 강화된 부문단체의 창립과 지역조직들의 창립러시가 이어지면서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관련한 조직중에 시민운동지원기금은 민간이 돈을 모아 시민단체들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정부나 기업의 돈을 받아 시민단체의 자율성을 독립성을 훼손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시민단체의 언론으로 시민의 신문도 만들어졌습니다.

90년대 후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연대의 창립도 이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90년대 후반 시민단체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시민운동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강의시간에 이어집니다.)

하승창(함께하는 시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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