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 파워]소비자운동의 새 트렌드

  •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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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30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개막식이 열릴 예정이던 미국 시애틀의 파라마운트 극장 주변. 이날 파라마운트 극장 주변도로는 물론 개막식장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 도로는 모두 이른 아침부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5만여명의 시위대에 의해 점령됐다.

미국 정부는 곧바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최루탄 등으로 시위대 해산에 나섰지만 오전 10시로 예정된 개막식은 5시간 이상 지연됐다. 나아가 이날의 시위는 폭넓은 무역자유화를 통해 21세기에 걸맞은 교역질서를 만들자는 세계무역기구의 ‘뉴라운드 협상’ 자체가 무산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렇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듯 엄청난 성과를 일궈낸 이들 시위대원은 세계 80여개국에서 몰려든 1200여 시민단체의 회원들. ‘전미 노총 산업별회의(AFL-CIO)’를 비롯해 프랑스의 농업분야 시민단체, 우리나라의 ‘WTO 국민연대’ 및 노동 농업 환경 인권 소비자 등 각 분야의 시민단체들이 총망라됐다.

결국 세계 비정부기구(NGO)들의 연대시위에 정부기구(GO)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국제기구에 대한 NGO의 시위는 그동안 간헐적으로 있긴 했지만 NGO가 GO로부터 결정적인 항복을 받아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처럼 세계 소비자운동의 수준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자국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싸웠지만 이제는 국제기구에 대항하는 등 ‘시민단체의 세계화(Civil Globalization)’와 ‘소비자의 지구촌화(Consumer Globalization)’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단체의 국제기구인 국제소비자기구(Consumers International·CI)의 전략도 크게 바뀌고 있다. 과거엔 각국 수준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고 개별국가의 소비자단체들에 조언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젠 어떻게 전지구적 차원의 캠페인을 제대로 해낼 것인가에 집중돼 있다. 국제소비자기구가 지난해 말 영국 배스(Bath)에서 열린 정책세미나에서 세계적 캠페인을 전담하는 글로벌 캠페인 매니저를 따로 두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소비자기구는 이에 따라 4월 인도에서 열리는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와 5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리는 코덱스(CODEX)회의에도 적극 참여할 예정. 식품의 안전 및 표시기준을 결정하는 코덱스회의는 유전자조작식품(GMO) 등 소비자기구가 최근 중점을 두고 있는 식품안전 확보운동이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계기인데다 무역 역시 소비자운동의 전통적인 주요 의제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소비자운동이 한 나라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 운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무엇보다 최근 개별국 정부가 소비자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국제기구의 결정이 각국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 예전엔 국가가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지만 점차 개별국가의 힘은 약화되고 국제기구의 힘이 ‘다국적 정부’라고 불릴 만큼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운동의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통신수단의 발달에 있다. 예전엔 직접 각국을 방문하거나 국제전화를 통해야만 각국 소비자단체의 연대활동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E메일 하나로 동시에 수십개국에 산재한 소비자단체 간부들과 협의가 가능하다. 지난해 미국 시애틀에서의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때 시애틀뿐만 아니라 런던 등 유럽 각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민단체들이 시위를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

소비자운동의 방향도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제품의 품질과 안전성, 가격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제는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환경파괴의 방지 등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인류의 항구적인 소비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지구환경의 보호가 싼 값에 많은 제품을 공급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자상거래에 대한 소비자와 소비자단체의 관심이 증대한 것도 큰 변화. 국제소비자기구는 앞으로 10∼20년 안에 전자상거래의 규모가 전통적 방식 상거래의 절반 이상에 이를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전자상거래에 관한 한 아직 소비자 권리를 보장할 법규와 제도가 미비한 실정.

국제소비자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전자상거래로 구입한 물품 가운데 70%는 제때 도착하지 않으며 30%는 품질에 하자가 있고 10% 가량은 물건 값을 지불했는데도 아예 도착하지 않는 등 전통적 거래와 달리 소비자들의 불만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의 김재옥(金在玉)사무총장은 “갈수록 개별국가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국제기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며 “따라서 각국 소비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각국 소비자단체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은 갈수록 증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국제소비자운동의 새 흐름, 바로 거기에 ‘소비자 주권’의 미래가 있다는 얘기다.

▼ 국제소비자기구, 120개국 217개단체 가입 ▼

국제소비자기구(Consumers International·CI)는 세계적인 비정부기구로서 각국 소비자운동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60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설립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 등 120개국 217개의 소비자단체가 가입해 있으며 아시아 중남미 등 5개 지역에 지역본부가 있다.

CI는 그동안 제품의 표준과 환경, 건강, 사회정책 등에 대한 소비자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최근엔 전자상거래 등 새로운 경제현상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비자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절대 중립과 독립성을 강조하나 최근 일부 개도국 회원단체들로부터 “CI는 선진국 소비자의 관심영역에만 신경을 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인터뷰 / 송보경 소시모 회장 ▼

“지난 1000년이 정부기구(GO)의 시대였다면 새 밀레니엄은 비정부기구(NGO)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세계적 경향에 발맞추기 위해 정부는 소비자단체를 경쟁자나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합니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의 송보경(宋寶炅)회장이 바라보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정부가 국제기구에서 제대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NGO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데 우리 공무원들은 아직 NGO를 정부의 견제 기구로만 본다는 것. 그러다 보니 국제무대에서 GO와 NGO가 협력, 국익을 관철하는 선진국에 비해 협상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제소비자기구(CI)의 명예재무이사이기도 한 송회장으로부터 21세기의 소비자운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새 천년을 향한 세계 소비자운동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갈수록 시장이 세계화되고 있다. 이를 규율하는 각종 국제 기구의 의사 결정 과정에 우리가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정부에만 맡기지 말고 이런 과정에 소비자단체와 소비자가 적극 참여해야 한다.”

―국제 소비자운동의 추세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와 시민단체가 따로 논다. 국제기구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최근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많다.”

―국제 소비자운동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우리나라는 소시모가 CI의 집행이사 단체이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이견을 조율하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소비자운동이 취약한 것이 약점이다.”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 각국 소비자 수준-관심 달라 국제연대 진통겪기도 ▼

소비자운동이 ‘일국주의(一國主義)’에서 ‘세계주의(世界主義)’로 바뀌고 있지만 세계 각국 소비자들의 관심과 수준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

국제소비자기구(CI)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각국 소비자단체의 목소리. 지난해 11월 영국 배스에서 열린 총회에서도 선진국과 중남미 아프리카의 개도국 소비자단체들은 향후 역점사업의 방향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영국측 대표는 “앞으로는 전자상거래가 소비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며 관련정책의 입안을 제의했으나 인도대표는 “우리는 직접 보고 만지고 흥정한 뒤 제품을 산다”며 전자상거래의 중요성을 깎아내렸고 짐바브웨 대표는 “우리는 컴퓨터 있는 마을이 거의 없다”며 제의 자체를 아예 일축해버렸다.

남미의 경우 제품의 질이나 안전 등 전통적인 소비자운동은 ‘사치’에 해당한다. 상당수 국민이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할 경제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11월 남아공에서 열리는 CI 총회에서 이런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재정의 80% 가량을 부담해 온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호주 벨기에 등 선진 6개국의 목소리에 눌려온 개도국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각국 소비자운동의 들쭉날쭉한 수준도 국제연대를 어렵게 하는 요인. 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소비자운동은 이미 정부와 기업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70년대 시작된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역부족이며 90년대 들어 겨우 싹튼 아프리카 소비자운동은 조직을 유지하는 것만도 힘겹기 때문이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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