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딸의 연애와 결혼

  • 입력 2000년 2월 28일 19시 51분


(딸내미는 거실 소파에 번듯이 누워있고 엄마는 그 딸내미 먹이겠다고 주방에서 국수를 삶고 있다.)

딸〓엄마, 시집갈까봐.

(울 엄마 쏜살같이 달려와서리 내 앞에서 우뚝서서)

엄마〓그래? 정말 시집갈래? 잘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야?

딸〓내가 지리산에서 괜찮은 남자를 봤거든. 나 아무래도 그 사람한테 시집갈까봐.

엄마〓(한 옥타브 높아진 소리로) 그래? 남자 맞지?

딸〓응. 근데 아직 학생이야.

엄마〓나이가 몇인데 아직 학생이냐? 늦게 학교갔대?

딸〓아니 정상적으로 갔어.

엄마〓그래? 전공이 뭔데?

딸〓전공은 무슨? 초등학생이야. 20년 나이차이만 어케 극복하면 한 번 가볼라구.

엄마〓무늬만 딸인게 확실해. 웬수.

그후로 울 엄마는 죄없는 국수만 찬물에 벅벅 빨으셨다.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도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엄마가 만들어준 비빔국수가 너무 매워서리 물을 계속 마셔댔더니 뱃속에서 국수가 불어서 숨쉬기도 힘에 겨웠다. 딸내미는 속으로, ‘무늬만 엄마가 확실해’.

(ID 파랑무늬인 30세 여성이 PC통신 나우누리에 올린 글)

[딸의 연애와 결혼]

결혼을 ‘여자인생의 빅딜’쯤으로 여기는 엄마들은 딸의 연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든다. 엄마 세대에게 연애는 결혼의 전주곡. 당연히 딸은 결혼에 적합한 사람과 연애해야 한다.

대구에서 고교를 졸업한 김모양(23·대구 봉덕동)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엄마‘품’을 떠나던 날, 엄마는 내 두 손을 꼭잡으며 △△출신, 딸많은 집 막내아들, 나보다 학벌이 낮은 남자는 절대 사귀면 안된다고 간곡히 당부했다”고 떠올린다.

연애의 사전적 의미인 ‘사랑’이 결혼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과시하려는 ‘차별화’ 무대로서 결혼을 선택한 50∼60대 중산층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아줌마’로부터 ‘사모님’으로 신분상승을 꾀했기 때문.”(연세대 조한혜정교수의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중).

이 ‘수완좋고 욕심많은’ 여자의 후예들은 때로는 엄마처럼 결혼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 연애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엄마와 다르기 때문에 엄마의 개입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엄마는 ‘네가 결혼할 때까지 온전히 보호했다가 순결한 채로 남편에게 양도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이소담씨의 ‘대학입시보다 더 힘겨운 결혼전쟁’ 중)

▼엄마, 연애는 연애예요▼

이소라씨(25·한국예술종합학교 시나리오과)는 연애를 ‘탐구적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씨의 엄마 김윤자씨(52·경기 안양시 평촌)는 ‘결혼을 전제로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씨는 동아리 친구와의 연애를 엄마에게 숨겼다.

“남자친구는 집에 자주 놀러왔고 싹싹하게 굴어 엄마가 마음에 들어하셨죠. 사귄다고 하면 엄만 결혼상대자로 ‘안전’하다며 결혼하라고 했을 거예요.”(이씨)

“우리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맞았어요. 결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됐어요. 이젠 시대가 바뀌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김씨)

얼마 전 서울의 모 대학에서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이성교제를 하고 있다는 학생은 49.5%였으나 이중 ‘사랑하는 사이’의 3.5%, ‘결혼을 약속한 사이’의 30.8%만이 결혼 가능성에 대해 ‘확실하다’고 응답했다. 결혼과 연애(또는 성)는 별개임을 분명히 한 것.

▼사랑의 조건, 결혼의 조건▼

정모씨(23·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한 살 연하의 학과 후배를 남자친구로 사귀며 엄마 박모씨(51)의 ‘이중성’을 알게 됐다.

대학졸업식 때 후배라며 남자 친구를 인사시켰을 때 딸에게 “좋은 여자있으면 (이 남자에게)소개시켜주라”며 좋게 평가하던 엄마. 그런데 “사실은 내 남자친구”라니까 태도가 돌변했다. 결혼상대는 못된다는 이유. 연하의 남자와 사귀면 결혼적령기를 놓치기 쉽고 여자가 졸업 취업 등 모든 일을 먼저 경험하니까 남자에게 의지할 구석이 적어진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친구분의 딸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한다니까 ‘네 딸 정말 능력있다’고 하셨어요.”(정씨)

정씨는 학벌 종교차이 경제력 등의 문제 때문에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모가 항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뒤웅박팔자-스스로 뒤집어라…▼

그러나 여자의 인생이 남편에 의해 결정되는 ‘뒤웅박 팔자’를 거부하는 딸을 후원하는 엄마도 적지 않다.

배정남씨(48·서울 동작구 사당동)는 딸 김수진씨(22)의 연애나 남자친구엔 관심이 없다. 대학 졸업반이 되도록 남자 친구가 없는 딸아이. 처음 2년 동안은 “왜 미팅하지 않니”“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먼저 데이트 신청해라”고 채근했다. 그러나 딸의 한결같은 반응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 배씨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딸이 ‘내공’을 쌓도록 돕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지는 않지만 평생 자립해서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예요. ‘결혼하면 남편이 해결해줄테니까’하면서 아무 대책없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가족학박사 유계숙씨는 “자녀는 부모의 부부관계를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부모는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비록 엄마가 만족하는 듯 보일지라도 최근엔 아버지와 가족에 희생하는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는 딸이 느는 추세. 그러나 막상 결혼이 결정되면 혼수를 둘러싼 엄마와 딸의 대립은 치열해지는데….

<김진경·이나연기자>kjk9@donga.com

▼다음주 주제 '결혼과 혼수'▼

‘엄마와 딸’시리즈 다음주 주제는 ‘결혼과 혼수’입니다. 딸의 결혼과 혼수장만을 둘러싼 독자들의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E메일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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