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딸 낳을땐 서운했지만 인생동지로 유대감

  • 입력 2000년 1월 3일 20시 12분


98년 첫 아들을 낳은 송혜림씨(36·경기 광명시 하안동)는 간호사가 안고온 아이를 보곤 울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뜻을 같이 하며 의지할 수 있는 딸을 원했거든요. 첫애가 딸이 아니면 또 낳아야 하는데, 낳아도 딸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송씨처럼 딸을 더 선호하거나 딸이어도 상관없다는 엄마들이 많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우리 문화에서 이들은 ‘소수’.

평소 남아선호 사상을 갖지 않았더라도, 더구나 남녀평등 사고방식이 뼛속까지 박힌 젊은 주부들이라도 막상 딸을 낳고 나면 서운하다는 얘기가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딸을 낳은 뒤 엄마들은 ‘또다른 자신’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하나의 여성을 낳은뒤▼

조희정씨(28·서울 서대문구 홍제동)는 ‘배가 옆으로 퍼진 게 아들인 것 같다’던 시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11개월 전 딸을 낳았다.

“남편이 차남이라 전 딸을 낳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딸을 낳고 엄마가 시댁에 전화하셨대요. ‘이왕이면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라고요. 딸 가진 죄죠. 시어머니는 딸이면 어떠냐고 그러셨다지만 제겐 ‘이젠 인왕산 정기가 있는 곳으로 이사했으니 다음엔 꼭 아들일거다’ 하시네요.”

네딸 중 첫째로 유럽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경희씨(29·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지난해 12월 딸을 낳은 뒤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딸이외의 인간(아들)을 낳아 키운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아기 낳기 전 산부인과 의사인 시누이가 초음파를 보더니 ‘딸이네’ 그러는데, 초음파는 100% 정확한게 아니니까 아들일 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더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요. 나도 대한민국에서 30년 산 게 맞구나 싶어 자괴감도 들고요.”

유교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첫째 의무는 아들을 낳아 가(家)라는 ‘집단 생명’을 보전해가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윤정로교수(인문사회과학부)는 “바라보기만 해도 든든한 아들에게 노후를 기대려는 부모는 상대적으로 적어졌지만 젊은 주부들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선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스스로의 생각이든, 집단 무의식이든.

▼딸과 함께 열리는 또다른 세상▼

5개월전 딸을 낳은 강모씨(27·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엄 마가 되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더라고 했다.

“의사 앞에서 다리를 쫙 벌리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애를 낳았는데 뭐…이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부끄러울 것도 없어졌어요.”

수줍고 연약해 보호받던 아가씨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강하고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차이를 이제야 정확히 구분할 수 있겠노라는 얘기.

인나영씨(28·인천 부평구 산곡동)는 1년 전 딸을 낳은 뒤에야 갈치조림을 해도 생선살은 자신에게 주고 밑바닥에 깔린 무만 먹던 친정엄마(박선월·53)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옷 사입는 걸 그렇게 좋아했는데…. 쇼윈도의 옷에 눈이 가다가도 딸애에게 해주고 싶은 게 먼저 떠올라요.”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완전히 희생하며 ‘일 가진 여성’으로의 삶을 강요하는 자신의 엄마처럼 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그만둔 엄마는 말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애는 내가 키워줄 테니 공부하라고. 그래서 애도 엄마에게 맡기고 박사시험을 봤죠. 그런데 회의가 생겨요. 공부한다고 다 교수되는 건 아닌데, 사실 난 그냥 주부로 살고 싶은데…. 그럼 이제까지 희생한 엄마는 뭐지?”늘 마음에 부담을 안고 살면서도 엄마가 알면 배신감을 느낄까봐 한번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엄마가 못다 이룬 소망을 성취하라는 부담을 자기 딸에게는 절대 지우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아들을 원했다면 그 딸이 맞이할 ‘역사’도 반복될까. 젊은 엄마들은 딸이 살아갈 세상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여자로 사는 게 선택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주체’가 될 수 있잖아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남녀차별도 점점 줄어들거고….”(송혜림씨)

▼다시보는 엄마의 얼굴▼

유소영씨(27·경기 고양시 일산구 후곡마을)에게는 딸 지현(10개월)을 낳고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서 또 그 딸로 끝없이 이어지는 ‘고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엄마가 많이 배우시지도 못해 어릴 땐 엄마한테 뭘 배운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분만대기실에서 저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보면서 답답한 거예요. 남편한테 ‘당신 나가고 엄마 불러줘’ 했어요. 엄마가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온 여자이고, 또 스승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요.”

딸을 낳고 나서 ‘신랑’보다 엄마가 더 좋아졌다며 유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만화에서 본 기억이 나요. 아이를 낳은 딸이 친정엄마에게 ‘엄마가 천사로 보여’하니까 그 엄마가 말하더군요. ‘조금 더 있어봐라, 하느님으로 보일 걸….’”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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