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훈이가 서울대 농대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께서 입학 선물로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 때 우리 삼형제는 피아노 대신 다른 악기를 사달라고 졸랐다. 피아노가 30만원 하던 무렵이었는데 3만원을 주고 기타, 베이스, 앰프, 드럼을 구입했다.
이렇게 아마추어 록밴드 '산울림' 을 조직한 우리는 1977년 12월 데뷔앨범을 발표할 때까지 이미 100여곡의 노래를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음악에 빠져 들었다.
우리는 '아니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황무지' 등을 연이어 히트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다. 음반이 수십만장 팔렸으나 인세를 받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TV에 출연하기 위해 용달차를 불러 직접 악기를 옮겼는가 하면 무대 설치도 우리가 직접 도맡았다.
결국 우리는 1983년 자진 해산했다. 형제간의 불화 때문도 아니고 인기가 떨어져서도 아니었다. 일단 다른 '밥 벌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각자 회사원이 됐고 나만 가수 겸 DJ, 연기자로 연예계에 남았다. 그렇게 13년이 흐른 96년, 산울림 해체후에도 꾸준히 활동해온 팬클럽이 우리에게 재결합을 제의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97년 13집을 낼 수 있었다. 예전만큼의 인기는 아니어도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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