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인술’의 의미 모르면 환자를 인간 아닌 제품으로 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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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고 신해철 씨의 시신을 부검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이동하는 모습. 유족은 병원의 명백한 과실이라고 주장한 반면, 병원 측은 이를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 동아일보DB
11월 3일 고 신해철 씨의 시신을 부검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이동하는 모습. 유족은 병원의 명백한 과실이라고 주장한 반면, 병원 측은 이를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한 유명 가수의 죽음으로 촉발된 의료사고 논란을 보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 국민이 의료계에 보내는 불신과 지탄의 원인에 대한 반성과 해법에 대한 고민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생산 제품의 질 관리 효율화 운동 중에 ‘6 시그마’라는 것이 있다. 100만 개 제품 중 6개 이내만 불량품이 되도록 하자는 고도의 생산 효율화 달성 운동이다. 의료계에서도 효율적인 병원 운영을 위해 6 시그마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야말로 불량률이 제로여야 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완벽하게 질 관리가 이뤄져야 하는 분야이다. 의료 행위는 오묘한 인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실력, 경험, 인술(仁術)을 아우르는 고도의 종합예술에 가까운 창작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실력이 부족하면 사고가 나고 경험이 부족하면 되는 것, 안 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인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제품으로 보게 된다. 의료는 종교와도 달라서 혼자 구도하고 수양하여 득도(?)할 수도 없는 분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사라는 직업은 참으로 힘들고 까다로운 직종이 아닐 수 없다. 환자와 가족이 항상 곁에 붙어 있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고는 득도의 ‘득’자도 입 밖에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의과대학을 들어간 후 평생 의사로서 산다면 한 40년 정도를 봉사할 수 있다. 다른 기술이 없으니 의사로 시작해서 의사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보통 의사들의 삶이다.

의사의 인생을 세 단계 정도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단계는 길고 험한 수련 과정이다. 고통과 인내의 시기이지만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의대 학생일 때는 오로지 공부에 매진하고, 수련 기간에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습득해야 하며 전문의 자격이 주어진 후에는 돌팔이 소리를 듣지 않도록 잠을 아껴 가며 연마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 시기만 해도 짧은 가방끈(경험과 실력) 덕에, 든든한 선배들 덕에 비교적 안전하다. 환자와 가족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도 없어 편하다. 만약 이 시기에 환자를 인간으로 보는 혜안의 가르침까지 접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축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돌팔이가 되면 평생 돌팔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1단계 수련의 단계를 지나면 2단계로 접어든다. 그런데 1단계를 무사히 또는 특출하게 마친 의사라고 평가받을수록 위험한 게 바로 이 시기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헤어나기 힘든 꽉 찬 자신감’ 속에 빠져들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의사들은 젊고 의욕적이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핵무기’가 된다. 핵무기의 특성상 원자력 발전에 쓰이면 인류에 보탬이 되겠지만 혹시라도 북한이 만드는 미사일 제작 같은 데 쓰이면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이 시기는 성찰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기 어려운 시기라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장애물이 없고 장애물이 나타나도 뚫고 간다는 용기와 의욕만 팽배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본인 치료 방침만 옳고 유일한 최고 진료지침이라 여길 수 있다.

과도한 지식 자랑으로 동료와 환자 가슴에 송곳을 꽂을 수도 있다. 그 ‘자뻑성(?) 헌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 선진화와 국민 건강 행복권을 견인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간혹 본의 아니게 환자를 단순히 ‘병(病)이 달려 있는 제품(불량품)’으로 보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3단계 시기는 후배들의 눈부신 활약을 보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끼고 동료 의사의 진료 기술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아량과 통합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때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을 보면 모든 의사에게 이런 경지가 오는 것 같지는 않아 서글프다.

어쨌든 이 시기가 오면 실수나 부주의로 부끄러웠던 진료를 했던 기억, 환자와 가족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소홀히 했던 기억, 그들의 어려운 여건을 돕지 못하고 수수방관한 기억들이 먼지 가득한 기억 창고에서 나와 어리석음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하게 한다.

진의(眞醫)의 경지라면 환자가 죽는 것, 아파하는 것, 상처가 곪는 것, 환자에게 잘못된 약을 주는 것, 병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 이 모든 것이 ‘나의 아픔’으로 인식된다. 필자는 1단계도 2단계도 3단계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의사인 것 같아 부끄럽다. 진의가 되고픈 욕망은 있으나 쉽지 않은 길임을 알기에 자신은 없다.

이번 신해철 씨 사건의 경우 모든 의사들은 환자를 일부러 소홀히 다루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담당 의사는 충분한 경험과 기술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소 환자를 제품(?)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연배로 보면 필자보다 후배인 것 같아 3단계를 준비하는 2단계 의사 정도로 봐주고 싶다. 망자의 사인(死因)은 결국 밝혀지겠지만 환자의 치료 자체보다는 환자와 가족을 한 인간과 그 가족으로 보는 시야가 조금은 미흡했던 것 같아 아쉽다. 수많은 치료 경험 때문에 생긴 자신감도 약간 과잉이었던 것 같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의료사고#인술#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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