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60>공동체와 역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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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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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가의 조언이 필요하신가요

“최후의 수단은 한 가지. 역술원에 가서 물어보자!” 2006년 여름, 내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의 거처를 서울 원남동에서 남산으로 옮길 때의 일이다. 이사는 코앞에 닥치는데 건물은 빠지지 않고 한마디로 진퇴양난, 오리무중의 상황이었다. 수십 명의 식구들이 8월의 불볕더위를 뚫고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다 허사였다. 마침내 우리가 마지막으로 낸 결론이 바로 ‘용한 점쟁이’였다. 명색이 지식인 공동체였건만 그 지식으로는 상황의 타개는커녕 최소한의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주지하듯, 그 지식의 토대는 ‘근대과학’이다. 근대과학이 망라하는 영역은 엄청나다. 빅뱅에서 유전자,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 사회경제적 시스템까지. 다른 한편 참으로 무능하다. 예컨대 과학은 어째서 버블경제의 추락을 예견조차 못했을까? 심지어 지난번 선거 때는 출구조사조차 다 틀렸다. 무려 200억 원이라는 돈을 들이고서도 말이다. 또 지진과 해일이 코앞에 닥쳐와도 아무런 징조도 포착하지 못한다. 이렇듯 과학은 위대한 만큼 초라하기 그지없다. 특히 삶의 구체적 현장에 대해선 어떤 지침도 주지 못한다. 역학과 주술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리라.

역술이 사람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다. 심지어 여기저기 용하다는 곳을 찾아 ‘국토순례’도 다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연은 구구하지만, 처녀 총각의 경우는 대개 연애와 짝짓기, 중년 남녀의 경우는 자식 교육과 직장, 사업 등이 역술을 찾는 이유다. 연애와 자식 교육과 사업. 현대인들이 가장 주력하는 항목 아닌가. 얼마나 많은 제도와 서비스가 이 항목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 국가 전체가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거로도 부족해 역술가의 조언이 필요하다니. 전자가 지나치게 무능한 건가? 아니면 후자가 너무 탁월한 건가? 뭐가 됐든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실제로 서울 시내에는 사주카페에 역술원이 즐비하다. 그뿐인가. 전국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점집이나 역술원은 꼭 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역술가만 해도 대략 3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부대인구까지 합치면 엄청난 수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남미와 아프리카, 시베리아 등등 전세계적으로 주술사들의 약진은 눈부시다. 그만큼 점성술 혹은 운명학은 현대인들의 일상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비근한 예로 거의 모든 일간지에는 ‘오늘의 운세’라는 코너가 있다.

그래서 참 궁금하다.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는 왜 그 같은 지혜가 없는 것일까? 공동체는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현장이다. 몸에 관한 앎, 운명에 대한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한데 왜 공동체는 명분과 이념 그리고 논리적 공통성만 갖추면 된다고 간주하는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정서적 균열과 관련돼 있다. 그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습속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그때 운명은 한편으론 몸과, 다른 한편으론 자연과 깊이 연동돼 있다. 몸과 인생과 자연, 그 ‘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가 곧 운명학이자 역술이다.

그래서 정말 궁금하다. 이렇게 중요하면서 또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걸 직접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공동체#역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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