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를 들고]불치 망막질환자 보면 가슴 아파… ‘왕의 안수’ 같은 신통력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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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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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순천향대병원 안과교수
이성진 순천향대병원 안과교수
70대 남자가 가족과 함께 안과 진료실에 들어섰다. 힘없이 얼굴의 웃음 주름을 겨우 움직이며 “혹시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어요”라고 했다.

환자의 눈 검사에서 동공을 통해 검은 점들이 가득 퍼져 있는 망막이 눈에 들어왔다. 망막색소변성이다. 젊을 때 야맹증이 있다가 중년 이후에 시야가 좁아지며 시력의 손실이 올 수 있는 유전성 망막질환이다. 치료법은 없다. 망막전문의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중세 왕들은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왕은 네게 안수하며, 신이 너를 치료하시리라”라고 기도했다. 많은 환자가 이렇게 안수 기도를 받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당시 유행했던 피부샘 병은 결핵균이 목 림프절을 침범해 목 주위에 주렁주렁 염증 덩어리가 생기는 병이다. 고름을 째면 감염이 확산돼 문제가 더 커졌다. 몸은 말라갔고, 눈도 세균에 침범당해 실명 위기에 처했다. 당시 유일한 치료법이 왕의 안수였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한 달에 533명에게, 프랑스의 앙리 4세는 한 번에 1500명에게 ‘왕의 안수’를 줬다. 왕의 손길을 받은 병의 증상과 다양한 치료법, 효과는 1768년 영국인 몰리에 의해 책으로 남겨졌으며 1824년까지 42회 증보판을 냈다.

환자는 “다시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만”이라며 체념의 말을 남겼다. 마음이 아팠다. 신성한 능력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왕의 안수’를 해 드리고 싶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시야가 많이 좁아졌지만, 지금까지 시력이 이 정도 남아 있다면 실명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줄기세포, 인공망막, 유전자 치료와 같은 연구가 상당히 진행됐습니다.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을 드시면서 남아 있는 망막을 건강하게 관리한다면 이런 치료를 받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유전성 색소변성뿐 아니라 황반변성의 경우도 시원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공망막의 경우 컴퓨터 칩을 넣어 환자가 사물을 인식하도록 하는 치료법인데 아직은 그림자 인식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향후 화상인식 기술만 발전되면 충분히 인공망막으로도 시력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성진 순천향대병원 안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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