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키즈]<5>“일기요? 사진으로 쓰죠”

  • 입력 2005년 2월 10일 17시 40분


코멘트
《서울 태릉중 3년 이모 양(16)이 개인 홈페이지에 띄운 1월 29일 일기. 소주병과 소주잔을 찍은 사진과 “하루에 한 잔은 약이래요”라는 한 줄의 글이 전부다. 이 양은 어머니와 말다툼 끝에 어머니가 충고한 한마디 “뭐든지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즉시 밖에 나가 소주를 구해와 사진을 찍고 일기를 썼다. 이 양의 일기를 보고 한 아저씨는 “학생이 왜 이런 사진을 찍어 올리느냐”고 꾸짖는 e메일을 보냈다. 이 양은 “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소주 사진을 썼을 뿐인데 어른들은 내 느낌이 무엇일까 생각은 안 하고 소주만 본다”고 섭섭해 했다.》

▽사진일기의 등장=요즘 10대들은 문자로 쓴 일기보다 ‘사진일기’를 주로 쓴다. 수십만 명의 10대가 인터넷에 올린 일기 중 문자로만 쓴 일기는 찾기 어렵다.

경기 의정부여고 1년 최모 양(17)의 홈페이지에는 자신의 생활이나 느낌을 표현한 사진 1000여 장이 올라와 있다. 최 양은 6일 일기에 한 발레리나가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는 사진과 “난 최고가 될 거야”라는 글을 띄웠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인터넷에 떠있는 사진을 퍼와 표현했어요.”

일기라는 형식 외에도 시화(詩畵)처럼 사진과 댓글을 인터넷에 띄운 청소년도 많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경기 안양시 양명고 3년 권모 씨(19)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느껴보자’는 제목의 공간을 만들어 사진을 올린다. 권 군이 ‘사랑을 받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랑을 주는 일’이라는 글과 함께 올린, 새싹이 돋아난 사진은 6일만에 600여 명이 퍼갔다.

▽퇴화된 감각의 재발견=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진일기의 유행을 “시각의 회복”이라고 표현한다.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욕구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문자발명 이후 퇴화됐지만 디지털 키즈가 이를 복원시키고 있다는 것.

10대들이 문자 메시지보다 최고 30배까지 비싼 이미지 메일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SK텔레콤에 따르면 작년 12월 한 달 동안 송신된 이미지 메일은 960만 건이다.

이런 특성은 손목시계처럼 보편화된 디지털카메라와 폰카메라에서 시작된 것이다. 10대들은 시험시간표나 친구의 노트를 손으로 쓰기보다 폰카로 찍어 보관한다.

최근 인터넷에는 자음 두 글자가 간판에서 떨어져 ‘ㅜㅜ빌라’라는 모습이 된 연립주택의 모습이 회자되고 있다. ‘ㅜㅜ'는 우울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포착하기 어렵다.

▽논리력 퇴화 우려=상당수 교사들은 10대의 이미지 선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고급 정보의 습득이나 깊이 있는 사고는 문자를 통해서 가능한데 10대가 문자로 표현된 정보를 지루하게 여기고 기피한다는 것. 서울 수도공고 교사 이영현 씨(47)는 “영상매체를 이용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집중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며 “학생들의 논리력이나 사고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이미지에 대한 탐식(貪食)은 ‘눈에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가치체계를 은연중 내면화시킨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최영묵 교수는 “시각적인 미가 절대적인 기준이 돼 인생의 다양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기성세대의 이런 우려 자체가 “문자 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반박하는 이도 상당수다. 사진평론가 김동선 씨는 “기존의 의사소통 방법이 너무 문자에 치중됐다고도 볼 수 있다”며 “10대의 이미지 선호는 문자 중심적 의사소통단계에서 문자와 이미지가 조화롭게 사용되는 훨씬 진보된 의사소통을 하는 시대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Know-Where 族’…검색만능 시대▼

"백범일지 요약 없나요"
스스로 공부 않고 베끼기 유행
사고력 저하 '정보풍요속 빈곤'

“삼국시대의 ‘삼국’은 어떤 나라들이지?”

“…….”

서울 번동중 국사 교사 오원식 씨(35)는 지난해 수업시간에 이런 질문을 했다가 놀랐다. 삼국시대라고 가정하고 신문을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냈더니 대부분의 학생이 지도와 유물 사진까지 넣어 멋지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일부 학생은 숙제를 하고도 삼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10대는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워낙 정보가 넘쳐나고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생긴 풍경이다.

▽‘노웨어족’의 출현=지금은 ‘노웨어(know-where)의 시대’로 불린다. 어느 곳에 어떤 정보가 있는지 아는 게 경쟁력이라는 의미다. 10대들은 대부분 ‘노웨어족’이다.

고객 대상 판촉 이벤트에서 1등으로 뽑힌 대구지역 여고생들을 데리고 2003년 일본 후쿠오카에 다녀온 SK텔레콤 김상규 과장. 그는 현지에 도착해서 학생들이 교사에게 “우리가 묵는 호텔과 이름이 같은 호텔이 일본에 여러 군데 있는데 유독 여기만 수영장이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뿐 아니라 볼 만한 곳은 어디어디인데 프로그램에는 어디가 빠졌다는 식의 시시콜콜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자동번역 프로그램을 활용해 일본 사이트까지 모조리 뒤져 진행요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

서울 J고 교사 유봉희 씨(29)는 수업시간에 농담 삼아 “선생님한테 너만 한 자식이 있어”라고 얘기했다가 다음날 학생들의 항의를 받았다. 학생들이 인터넷을 뒤져 교사의 개인 홈페이지를 찾아냈던 것. 자식이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전날 밤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신 사실까지 알아냈다.

▽인터넷에 무조건 의존=“‘어떤 목적으로 읽었는지 생각하며 백범일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봅시다’가 숙제예요. 너무 길지 않게 부탁.”

지식을 서로 묻고 대답하는 인터넷 지식검색 서비스에는 이런 식의 질문이 수두룩하다. 숙제를 베끼겠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이 답변이 올라오면 읽어보지도 않고 출력해 제출한다. 그러다보니 답변 첫 머리에 나오는 ‘대답해 드릴게요’나 ‘이런 뜻으로 물어본 게 맞나요’라는 문장을 그대로 둔 채 내기도 한다.

서울 덕성여고 교사 현경호 씨(35)는 “베끼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게 문제”라며 “학습 효과를 놓고 보면 지식검색 서비스는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10대들은 앞뒤 맥락이나 시간 공간적인 개념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툭툭 내뱉는 경향도 보인다. 유 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서 산에 있고 ‘백’자로 시작한다는 힌트를 줬더니 ‘백록담’이라는 답변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성씨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성계가 이태백의 아들이냐’고 묻거나, 종교개혁에 앞장선 마르틴 루터를 배울 때는 철자가 같은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얘기를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요약은 싫어요”=10대는 인터넷이 주는 빠른 속도감에 취해 있다. 차분히 앉아 깊이 생각하거나 내용의 핵심을 파악해 요약하는 데 서툴다.

서울 남정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 김미영 씨(28)는 “아이들이 워낙 어려워하기 때문에 무엇을 요약해 오라는 숙제는 아예 안 낸다”고 말했다.

기성세대가 독서를 통해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지금 10대는 책 읽는 것 자체를 힘들어한다. 책 읽을 시간에 문제집을 풀거나 인터넷을 하는 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성적이 최상위권이고 학교 교지 편집위원인 서울 S여고 김모 양(17)은 “두꺼운 책을 보면 ‘언제 이 책을 다 읽고 줄거리를 이해할까’하는 걱정이 먼저 든다”고 털어놨다.

▼특별취재팀(경제부)▼

이병기 기자(팀장) eye@donga.com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