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디지털]칼 마르크스의 '소외'

  • 입력 2000년 1월 10일 08시 06분


M선생,

우리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10년이 시작되는 1990년을 전후해 동구 여러나라와 소련의 몰락을 지켜봤습니다. 이는 유럽의 동쪽, 즉 동독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몇 나라의 기존 정치체제의 붕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선생의 이름으로 성립된 국가체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는 2차대전 이후 지구상의 이데올로기적 양극체제를 지탱해 오던 2개 축 가운데 한쪽이 무너진 단극체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구 몰락과 신자유주의 물결▼

따라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은 현실 공산주의가 해체된 자리에 새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와 각축하던 미국과 서구제국은 이제 그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완벽한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하게 됐습니다.

미국 등 선진제국과 그들 국가를 기반으로 한 다국적기업들이 선도하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바야흐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도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 한세기 반 동안 자본주의의 취약한 고리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공산주의의 유령이 이제는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선생의 이름 역시 낡은 역사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M선생, 사태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아무런 거침없이 크고작은 국가의 장벽을 넘나들며 ‘세계화’를 가속화하던 1990년대 말,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모범적 경제성장을 이뤄나가던 한국 등 아시아의 몇몇 국가가 외환위기로 하루 아침에 파국을 맞았습니다.

▼돈 잘버는 사람이 대접받아▼

이제 이들 나라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조직의 생산성과 투명성이라는 경제논리에 따라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동의 유연성’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조직구성원들이 조직 바깥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낙오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종래보다 더욱 열악한 직장을 찾거나, 그것도 불가능해 일용잡직(日傭雜職)으로 고용되고, 마침내는 거리를 방황하는 실업자 생활을 견뎌야만 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업이 일상화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살아남은 자들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조직이 ‘합리적’으로 정한 목표의 달성에 신명을 바쳐야만 살아남고, 승진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돈독한 동지애로 맺어져 있던 동료는 적대적 라이벌이 되고, 경쟁회사는 먹고 먹히는 공격적 M&A(인수합병)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고객이나 소비자를 향한 그들의 광고활동은 철저한 프로퍼갠더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M선생, 이처럼 조직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온갖 발버둥을 치면서도 기어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그가 조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삶의 보람이고, 또 그가 하는 일이 신바람이 나서일까요? 아마 궁극적으로는 선생이 언급한 바 있는 금전적 보상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은 노동이 가장 인간다운 삶의 표현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주는 삶의 의미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참다운 노동이라고 얘기했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급료가 높은 사람은 훌륭하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유능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천하고 무능할 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직의 효율, 즉 생산성을 높인다면 그는 훌륭한 기업가요, 따라서 그에게는 범인(凡人)이 꿈도 꿀 수 없는 천문학적 성과급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력을 발휘하는 화폐는 이제 선생이 언급한 물신적(物神的) 특징을 완벽하게 갖춰 지상의 모든 인간을 철저한 배금주의자(拜金主義者)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조직, 국가는 이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그 알량한 양심이나 체통, 신의는 언제든 벗어던질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세기, 선생의 이름으로 불리던 전투적 이데올로기가 가져올 재난을 막기 위해 여러나라들이 채택한 갖가지 구빈(救貧)대책이나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은 그것의 현재적(顯在的) 위협이 사라진 시점에서 ‘작은 정부’ ‘효율적 국가재정’을 위해 하나하나 자취를 감춰가고 있습니다. 가난은 하늘도 다스릴 수 없거늘, 평등한 기회를 부여했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 국가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주장은 오늘날 엄청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을 유럽의 좌파정당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당연한 것처럼 주장됩니다.

그러기에 20대80으로 양극화된 부자와 빈자의 분포는 한 국가의 생산성이나 경제적 효율의 면에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150년 전, 자본주의의 참상을 노동자의 소외를 통해 갈파한 선생의 혜안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역사적 승리를 구가하는 이 시대에 말입니다. 인간의 물질적 삶이 엄청나게 풍요하고 편리해진 바로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핍박했던 19세기 중반 노동자의 상황을 연상하는 것이 결코 합당치는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갖가지 문명의 산물들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제대로 이르지 못하고, 필요치 않은 더 많은 물건들이 거짓된 욕구나 조작된 기호품으로서 소비자를 거침없이 유혹하는 게 오늘의 현실, 오늘의 노동자의 현실이 아닙니까.

▼배금주의 팽배 제로섬 사회▼

인간이 인간다운 노동의 열매를 향유하고, 자기가 만든 물건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는 이웃의 희열을 즐기기보다 타인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는 제로섬 게임이 산업사회나 주식시장에 팽배해 있는 게 또한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소외현상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려고 혼신의 정력을 기울인 선생의 탁월한 견해를 새로운 천년에도 하나의 지적 좌표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2000년대의 새로운 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는 새로운 가상공간은 인간의 생활세계를 과거의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얻어진 유전자지도의 완성과 유전자변형을 통한 새로운 생물체의 생산 등은 생명의 신비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세기를 풍미하던 배금주의 사회의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좌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으며, 바로 그런 관점에서 선생의 소외진단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노력들은 아직도 중요한 생명력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키워드-소외◇

‘소외’문제에 대한 관심은 1932년 칼 마르크스 (1818-1883)의 초기저작 ‘경제학·철학초고’(1844)가 출판됨으로써 촉발됐다.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핍박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참상을 소외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기의 생명을 대상화한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노동이 외적 강제에 의해 이뤄지므로 ‘노동활동’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간은 유적(類的) 존재를 구현하는 노동을 개인적 생존의 수단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이처럼 외화되고 소외된 노동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생산자와 비생산자(=자본가)의 적대적 관계를 통해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를 겪게 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된 제반 욕구가 화폐에 대한 강한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결국 화폐의 물신성(物神性)을 확고히 한다고 한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욕구는 점차 증가하고, 이것을 만족시켜줄 수단은 바로 화폐다. 인간의 노동과 그의 현존재의 소외된 본질인 이 화폐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그것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소유욕과 화폐의 물신성을 폐기하기 위한 인간의 자기귀환, 즉 사랑과 신뢰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의 공산주의 사회는 소외된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

그는 ‘경제학·철학초고’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제임스 밀 평주’(1844)에서 소외되지 않은 완벽한 노동의 모습을 예술가의 창조활동과 그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품,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이와 예술가의 교감에 비견되는 완벽한 인간의 노동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해방론은 상업주의에서 가장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계급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상정한 데 근거한다.

정문길<고려대학교 정경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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