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기자의 지금, 여기]“군함도 취재 집필에 27년… 상상력에 의존할 수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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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군함도’ 작가 한수산

소설 ‘군함도’의 작가 한수산 씨는 “소설가는 발굴하는 사람”이라며 “문학작품은 흩어진 역사적 사실 속에서 진실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복 70년이 넘었는데도 강제징용과 같은 일제의 악행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기록하고, 청산하지 못했다”며 “우리 정부뿐 아니라 소설가를 포함한 문화인들의 부끄러운 직무유기”라고도 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소설 ‘군함도’의 작가 한수산 씨는 “소설가는 발굴하는 사람”이라며 “문학작품은 흩어진 역사적 사실 속에서 진실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복 70년이 넘었는데도 강제징용과 같은 일제의 악행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기록하고, 청산하지 못했다”며 “우리 정부뿐 아니라 소설가를 포함한 문화인들의 부끄러운 직무유기”라고도 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전승훈 기자
전승훈 기자
《 소설 ‘군함도’의 작가 한수산 씨(71)를 만났다. 영화 ‘군함도’는 ‘국뽕’ 영화부터 ‘친일 영화’라는 비판까지 다양한 논란을 낳았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수록 군함도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이 때문에 한 씨가 27년간의 치열한 취재와 집필 끝에 지난해 펴낸 소설 군함도가 큰 조명을 받았다. 》
  
한 씨는 1989년 일본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한 후 군함도(일본명 하시마·端島)를 알게 됐다. 그는 “나가사키에서도 조선인 피폭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그중에서 90% 이상이 징용으로 끌려온 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30년 가까이 일본에서 강제징용 관련 기록과 문서, 피해자의 증언을 취재하고 소설로 집필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1990년에는 하시마 탄광에서 일했던 서정우 씨(1928∼2001)와 함께 군함도를 찾기도 했다. “조선인이 수용됐던 숙소에는 빈 링거병 같은 의료용 쓰레기만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숙소는 1960년대부터는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는 격리병동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갱도 입구에 30m 정도 들어가 보니 콘크리트로 막혀 있었다. 폐허가 된 숙소와 갱도 앞에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잊혀진 이들을 기억했다.”

“강제징용 무관심은 직무유기”

―하시마 탄광은 왜 인권의 사각지대일 수밖에 없었나.

“처음에는 영국이 투자 개발한 탄광이었지만 일본이 뺏어 관영탄광이 됐다. 인력이 부족하니까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까지 갱도에 투입했다. 죄수사역 때문에 폭력이 난무하는 강제노동이 군함도의 전통으로 남았다.”

―군함도는 왜 일본 군부가 중요시했나.


“군함도는 석탄 채굴량도 많고, 일본 최고 양질의 석탄이 나왔다. 발열량이 높아 연료용이 아닌 제철용으로 활용됐다. 하시마 탄광을 소유한 미쓰비시는 제로센 비행기, 군함, 어뢰, 대포 등을 만들어낸 대표적 전범기업이었다. 무기 제작용 연료를 생산하는 하시마 탄광은 군부에서 특별 관리했다.”

―하시마의 강제노동은 어땠나.

“지하 700∼1000m의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법정노동 시간은 12시간이었지만 갱도 내 작업 시간만 계산했다. 승강기를 타러 가고, 준비하는 시간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조선인 노동자는 600명 정도였는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1000명으로 늘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을 갔던 조선인까지 하시마로 끌고 온 것이다.”

―군함도 징용자들은 정말 임금을 한 푼도 못 받았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일제는 숙박비, 식비, 옷값, 신발값, 건강보험료를 받았고, 채권까지 사도록 했다. 서류상으론 월급을 줬지만 비용을 제하면 실수령액은 0원에 가까웠다. 1945년 말까지 귀국 조치된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손에 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군함도에도 위안부가 있었나.


“3곳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두 곳은 일본인 전용이고, 한 곳은 조선인 주인이 운영했다. 여성들은 미쓰비시 회사의 탄광 노무계에서 직접 관리했다. 그래서 ‘기업 위안부’라는 용어가 나왔다. 당국으로부터 ‘병이 제일 없는 곳’이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여기 있던 조선인 젊은 여성이 음독자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제 소설 속에도 젊은 조선 여성이 바다에 투신해 죽는 장면을 그렸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비해 강제징용 문제는 왜 관심을 덜 받았나.

“나도 의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끌려가서 혹사당하고 죽었는데 무관심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미쓰비시는 2015년 중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200명에 대해 사죄도 하고 배상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해서만 유독 ‘당시에 한국이 있었나. 다 일본인 아니었나’란 야만적 표현을 쓰면서 뻔뻔하게 나왔다. 한일청구권협상으로 다 끝났다는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 정부는 물론 소설가를 포함한 문화인들의 부끄러운 직무유기다.”

그의 소설 군함도는 2009년 일본어판으로도 출간됐다. 당시 아사히, 요미우리 등 일본의 주요 언론들로부터 “역사의 어두운 면,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면을 뜻하는 ‘부(負)’의 역사까지 낱낱이 밝혀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속 내용은 현실과 동떨어져”

―작가들은 어느 정도 취재한 뒤 상상을 덧붙여서 소설을 완성하지 않는가.


“과거사 문제에서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저널리스트보다 더 사실을 꼼꼼히 취재했다. 군함도 문제를 아는 일본인과 만났을 때 내가 한 발이라도 더 들어가야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 소설에 쓴 에피소드의 80% 이상은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도 함부로 상상해낸 것은 없다.”

그는 또 “과거사 문제는 철저히 교차 검증을 하고, 그 검증을 거쳐 합리적인 추론을 해야 한다”며 “어설픈 추론이나 부정확한 서술을 했다가는 일본에 꼬투리를 잡혀 반격 기회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군함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일본에서 강제징용과 원폭의 희생자였던 90대 할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고 전화를 걸어왔다. 군함도에서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무슨 놈의 전쟁을 하더라.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라 씁쓸했다고 한다. 판타지가 너무 강하면 오히려 진실이 가려진다.”

―군함도에서 실제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나.

“한두 사람은 성공했을 수 있다. 그러나 몇백 명의 집단 탈출은 불가능했다. 또한 탈출한들 일본인데 어디로 갈 것인가. 대부분 탈출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영화에서처럼 200∼300명씩 탈출해서 갈 곳이 있었다면야 오죽 좋았겠는가.”

―또 다른 부정확한 서술은….

“1925∼1945년 군함도 사망자 명단이 담긴 ‘화장매장인허증’이란 문서에는 120여 명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흔히들 ‘강제징용자 120명 사망’이라고 말한다. 명단엔 산모도 있고, 10개월과 다섯 살짜리 아이도 있다. 1925년엔 강제징용이 없었다. 징용은 1939∼1945년에 이뤄진 것이다. 또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뉴욕에서 선보인 광고에는 ‘120 killed’라고 나온다. ‘120명이 살해됐다’는 표현도 과하다. 하시마 탄광의 갱도가 섭씨 40도가 넘어 50∼60도였다는 말도 나온다. 그 온도에서 사람이 어떻게 작업을 하는가. 작은 꼬투리 때문에 전체적인 진실이 위협받아선 안 된다.”

―소설 속에서 조선인 젊은 광부가 갱내에서 죽었을 때 동료들이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울컥하게 되는데….

“눈물나게 하려고 지어낸 게 아니다. 땅속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부르면서 올라가는 건 일본 규슈지방의 오래된 전통이다. 시신만 올라가면 영혼이 땅속에서 헤맨다고 이름을 부르며 올라간다. 조선인 노동자들도 그랬겠구나. ‘창수야, 창수야, 올라가자!’고 한국 이름을 외치며 올라가도록 한 것이다.”

―소설에서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도 조선인 피폭자는 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누구나 피 흘리고 아프면 모국어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물 좀 주세요! 사람 살려!’ 같은 말이다. 그러면 들것에 환자를 싣고 가다가도 ‘조센진이네’라면서 길가에 버렸다고 한다. 내 소설의 원제인 ‘까마귀’는 탄광에서 온통 까맣던 조선인 광부, 원폭에 희생된 조선인 시신을 까마귀 떼들이 파먹던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군함도 징용자들도 원폭을 맞았나.

“군함도는 원폭 피해가 없었지만 조선인 징용자들이 나가사키 원폭 구조대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다. 아사히에서 출간된 책 ‘원폭 전후’에는 ‘구조대에 참여한 젊은 조선 징용공 제군의 활약은 잊을 수가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너무 눈물이 났다. 원폭 당시 일본인은 조선인을 버렸지만 조선인은 인간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졸렬했던 외교부의 군함도 대응”

―2015년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우리 외교부의 대응은….


“한마디로 졸렬했다. 뒤늦게 호들갑을 떨다가 ‘한국이 발목을 잡는다’는 인상만 주고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강제징용이 이뤄진 곳이라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선 안 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노예시장, 만델라 감옥,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반인륜 범죄가 행해진 곳도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우리의 목표도 처음부터 세계유산 반대가 아니라 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라는 점에 집중했어야 한다.”

―평생의 과제로 ‘기억의 3부작’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강제징용자 문제에 이어서 남은 주제는 무엇인가.

“‘근로정신대’와 ‘B급, 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은 조선인들의 문제를 다루고 싶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근로정신대’라고 한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었다.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소녀들은 대부분 병기공장이나 제사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정신대라고 이름 붙여 놓으니까 근로정신대를 다녀온 할머니들까지 사회적인 눈총 때문에 평생을 치욕과 고난 속에 살았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한국과 일본 법원에 임금청구 재판을 하는 법정소설을 쓸 생각이다. 소설을 통해서나마 명예를 회복하고,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

한 작가는 “영화 군함도가 역사를 왜곡했느니 하는 논란마저도 감사하다”며 “잊혀졌던 징용 문제를 수면 위로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오늘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문화인들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춘천의 한 극단이 제 소설을 ‘까마귀’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올렸다.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배우들이 10kg 이상씩 살을 뺀 모습이 눈물겨웠다. 군함도는 앞으로 더 많은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만들어져야 한다. 역사가 법적, 정치적으로 청산이 어려울 때는 문화적으로라도 기억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식민시대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일본이 뻔뻔스럽게 나오지 않게 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소설 군함도#작가 한수산#홀로코스트 영화#군함도 위안부#일본 강제징용#하시마 강제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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