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종이와 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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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눈을 떴다. 몸이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는 느낌. 전등 줄에 매달린 추도 손으로 툭 건드린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해마다 몇 주씩 여름휴가를 보내는 이 도시에서 이따금 겪는 일이다. 미미한 진동이긴 해도 늘 그렇듯 감정은 크게 동요되고 만다. 내가 지내는 방의 출입문 가까이에는 검은 백팩이 하나 있다. 이 집 가족을 위한 방재(防災)용 가방. 손전등, 휘슬, 비상식량, 현금, 안전모, 의약품 등이 들어 있을.

지난달인가, 초등학교 6학년 조카 일기장에서 도덕시간에 있었던 일을 읽게 되었다. 빙산을 만나서 구명보트로 갈아타야 하는 상황, 리스트 중에서 네 가지 물건만 골라서 가져갈 수 있다. 라이터, 은박 돗자리, 라면, 버너, 휘발유, 담요, 생수, 손거울, 낚싯대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르겠는가? 모든 모둠에서 고른 1위는 바로 생수. 그러나 재난정보센터의 자료를 바탕으로 선생님이 알려준 ‘바다에 고립되었을 때’ 필요한 물건 1위는 바로 아이들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손거울이라고 한다. 빛을 반사시켜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비슷한 이유로 2위와 3위도 각각 라이터와 은박 돗자리.

지상 전철을 타고 레인보 브리지를 지나 문구 박람회가 열리는 전시장으로 갔다. 문구용품 외에도 각종 생활용품이 전시된 그 넓은 전시장을 돌아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페이퍼 크래프트(paper craft)’가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거였다. 종이 공예라고 말하면 될까. 종이로 만든 각종 문구, 사무용품 부스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다이어리, 일기장, 편지지, 스티커, 테이프, 끈, 포장지 등.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구 박람회라고 들어서 뭔가 새로운 종류를 발견하지 않을까, 했던 기대와는 달랐다. 이미 아는 종이 문구에서 조금 더 세분화되고 디자인이 다양해졌을 뿐. 그리고 그런 보통의 문구류를 파는 매장에 의외로 관람객들이 가장 몰려 있었고.

나는 집주인의 양해를 받아 그 방재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도 종이와 펜이 있었다. 그것도 시에서 나눠준 방재 리스트에 속해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뭔가 기록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두었다고. 문구 박람회에서 펜을 든 채 각종 종이 제품에 뭔가를 쓰고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표현과 기록의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 만약 어떤 이에게 정신적 고립 같은 게 찾아왔을 때도 저편으로 신호를 보내는 손거울 역할을 하게 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종이와 펜. 얼마든지 소모해도 좋다고 스스로 말하는 듯한, 그 단순하고 헌신적인, 손닿는 데 있는 문구들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여전히 믿고 싶다. 어떤 불가피한 시대가 와도.
 
조경란 소설가
#방재 리스트#종이와 펜#바다에 고립되었을 때’ 필요한 물건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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