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75>을지로 옛 서산부인과와 김중업의 상상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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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7가 옛 서산부인과(김중업 설계, 1967년 건축)의 발코니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
서울 중구 을지로7가 옛 서산부인과(김중업 설계, 1967년 건축)의 발코니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
이 건물은 안팎으로 구석구석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위로 올려다볼 필요도 있다. 적당히 수고를 들이면 숨겨진 매력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근처 광희문과 한양공고 사이.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와 만나는 곳. 거기 독특한 모습의 5층짜리 뽀얀 건물이 있다. 건축주인 산부인과 서병준 의사의 의뢰에 따라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의 설계로 1967년에 개인 병원으로 지은 건물이다.

프랑스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김중업은 직선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곡선의 자유로움을 구현한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김중업의 곡선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이 바로 이것이다. 김중업은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점에 착안해 내부 공간을 자궁과 같이 디자인했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는 엄마의 몸속과 같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구현하기 위해 곡선과 원의 모티브를 과감하게 적용했다. 건물 여기저기 곡선과 원들이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건물 벽면과 바닥 이음매 부분도 둥글게 마감했다.

층층이 곡면으로 처리한 발코니가 특히 인상적이다. 밑에서 바라보면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곡면 발코니는 돌아가면서 이어져 올라간다. 그 모습이 마치 탯줄을 연상시킨다.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곡선으로 표현되면서 절묘하게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건물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스하다. 당시 한국 건축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자유롭고 과감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건물은 1995년까지 서산부인과의 병원으로 쓰였다. 하지만 1995년부터 산부인과 기능이 사라졌고 현재는 디자인회사 아리움의 사옥으로 쓰이고 있다. 아쉽게도 건물 주변엔 내력에 관한 표석이 하나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옛 서산부인과 건물 길 건너엔 한양도성의 광희문이 있다. 조선시대 이 문은 시신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였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서산부인과 건물이 들어섰다니, 죽음의 통로 바로 앞에 마주한 생명의 공간. 이건 우연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광희문과 옛 서산부인과. 두 공간이 서로 마주 보면서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옛 서산부인과#을지로 옛 서산부인과#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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