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실험실]소설책 낭독 발연기에 오글오글… ‘DJ+배우’는 아무나 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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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쏙쏙 또박또박, 오디오북 만들기

《 “나 또 임신했어. … 그 인간, 수술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어.
나 두 번이나 중절했다고. … 내가 무슨 암탉이야. 달걀만 낳는 암탉이냐고!”
기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신세 한탄하는 올케를 연기했다.
오디오북 제작업체인 오디언(서울 은평구)의 스튜디오에서 22일 이은조 작가의 소설 ‘수박’ 낭독에 도전한 것. 정성용 PD는 계속 “다시”를 외치며 말했다. 》


“별로 화난 것 같지가 않아요. 딱딱하고 책 읽는 것 같아요.”

듣는 책인 오디오북은 30, 40대 직장인이 출퇴근할 때 주로 이용한다. 어린이와 오래 책을 보기 힘든 고연령층도 애용한다. 여준호 예스24 e북 팀장은 “남성은 자기계발서, 여성은 소설과 자녀용 동화를 많이 구입한다”고 했다.

국내 오디오북 시장은 연간 1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오디오북 제작 1위인 오디언이 만든 물량은 2006년 100여 권에서 지난해 1000여 권으로 늘었다. 한만재 오디언 기획팀 과장은 “오디오북은 북미와 유럽에서 도서시장의 1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채널A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리포트를 만든 경험이 있다. ‘오디오북 낭독도 귀에 쏙쏙 들어오게 또박또박 읽으면 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낭독은 보통 성우가 한다. 미국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 조디 포스터 등 유명 배우가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2012년 배우 이보영이 ‘노인과 바다’를 낭독해 수익금 일부를 기부했다. 소설은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남녀 성우를 정한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4, 5명이 투입된다. 역사물은 남성이, 에세이는 여성이 주로 맡는다. 300쪽짜리 책을 낭독하면 10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대본작가가 2∼3시간 분량으로 줄인다. 원래 문장을 살리면서도 핵심 내용이 잘 담기도록 추려 내는 게 중요하다.

오디오북 낭독 중 연기에 애를 먹는 기자(왼쪽)에게 유경선 성우가 “푸념할 때는 높은 톤으로 빠르게, 돈 얘기를 할 때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은근하게 말해 보라”고 지도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오디오북 낭독 중 연기에 애를 먹는 기자(왼쪽)에게 유경선 성우가 “푸념할 때는 높은 톤으로 빠르게, 돈 얘기를 할 때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은근하게 말해 보라”고 지도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정 PD는 “기왕 하는 거 난도가 높은 소설을 해보라”며 ‘수박’을 권했다. 가슴에 멍울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집으로, ‘수박’ 편은 여기저기서 치이지만 꾹꾹 누른 채 버티는 여주인공 난주를 그렸다. ‘수박’ 편은 1시간 분량이어서 원문 그대로 낭독했다.

집에서 여러 번 연습하고 녹음해서 들으며 교정했지만 연기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 교양 연극 수업에서 조별 연극을 할 때 ‘행인1’을 해 본 게 전부인 기자에게 연기의 벽은 에베레스트 산만큼 높게 느껴졌다. 결국 유경선 성우가 긴급 투입됐다.

“화를 내다 넋두리하는 식으로 해보세요. 이렇게요.”

시범을 보이는 그를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순식간에 감정을 저렇게 잡다니. 과연 프로였다. 10번 이상 NG를 낸 끝에 겨우 OK 사인을 받았다. 내레이션을 할 때도 “발음은 정확한데 너무 딱딱하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하라”는 조언을 연거푸 받았다.

고비는 또 찾아왔다. 난주의 엄마가 전화해 푸념을 늘어놓은 후 중국 여행 경비를 은근히 요구하는 대목이었다. “너무 빠르다. 랩 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약사, 노파, 남편, 과일가게 주인까지…. 정 PD가 녹음한 것을 들려주자 ‘발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3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녹음이 끝났다. 성우가 하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NG 부분을 잘라내고 효과음과 음악을 넣는 등 편집을 거쳐야 오디오북이 완성된다.

목이 따갑고 빨리 눕고만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소설을 낭독하려면 ‘DJ+배우’가 돼야 하고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는 ‘DJ’가 돼야 한다는 것을. 가설은 무너졌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오디오북#소설#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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