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실험실]무모한 ‘덕질’속에 범접 못할 철학… 그대는 진정한 ‘덕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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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덕후’ 이종원씨 모델로 참 덕후 검증하기

《 최근 ‘덕후’(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비롯된 말)의 이미지가 ‘골방에 틀어박힌 마니아’에서 ‘학위 없는 전문가’ ‘능력자’ 등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덕후가 대중에게 인기를 끌자 ‘덕밍아웃’(덕후라고 공개하는 것)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하지만 덕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진짜 ‘덕후’로 인정받기 위해선 최소한의 검증도 필요하다. 기자는 여러 덕후와 주변인들로부터 조언을 얻어 덕후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 기준을 정한 뒤 이를 적용해보기로 했다. ‘버스 덕후’로 알려진 이종원 씨(20)를 만나 그의 ‘덕력’(덕후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

인터넷에서 임의로 뽑은 버스 사진을 즉석에서 들이밀어도 해당 버스의 역사와 특징을 척척 대답한 ‘버스 덕후’ 이종원 씨. 100여 년이 된 한국 버스의 자료를 망라해 ‘버스 대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인터넷에서 임의로 뽑은 버스 사진을 즉석에서 들이밀어도 해당 버스의 역사와 특징을 척척 대답한 ‘버스 덕후’ 이종원 씨. 100여 년이 된 한국 버스의 자료를 망라해 ‘버스 대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덕후의 자질에 대한 여러 견해를 종합한 결과 덕후는 ‘덕질’ 분야에 대한 사전 같은 전문지식과 그 세계를 파고드는 무모함이 기본이다. 물론 단순히 심취해서만은 안 된다. 사소한 분야라도 덕후가 된 데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고,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마저 들게 해야 한다. 서울 강남구에서 이 씨를 만난 기자는 우선 기본 검증을 위해 인터넷에서 임의로 뽑은 버스 사진 3장을 들이밀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질문부터 할게요, 이 버스는 뭐죠?”(기자)

“아시아 AB236R, 1981년 출시됐지만 6대만 생산되고 만 비운의 버스죠.”(이 씨)

“(허걱) 아, 그럼 이건요?”(기자)

“이건 대우 BF101이네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네요. 얼마 전에 미얀마 가서 직접 보고 왔어요(웃음).”(이 씨)

“네? 미얀마요?”(기자)

그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우 BF101 등 버스를 보기 위해 이달 열흘 가까이 국내 중고 버스를 주로 수입하는 미얀마를 찾아갔다. 그가 사진으로만 보던 버스를 미얀마에서 실물로 확인한 게 10여 종, 140여 대에 달한다. 이 씨의 일과는 미얀마에서 찍어온 1만여 장의 버스 사진을 추리는 것. 그의 얼굴과 목덜미는 남국에서 쬔 햇볕 때문에 붉게 그을려 있었다. 지난해 2월에는 같은 이유로 러시아도 다녀왔다. 현지인과 정보 교류를 하기 위해 러시아어도 대화 가능한 수준까지 익혔다. 오직 버스를 위해. 무모함 지수도 역시 합격.

이종원 씨가 미얀마에서 발견한 대우 BF101 버스. 겉만 빼고 대부분 개조됐
지만 이 씨는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했다. 이종원 씨 제공
이종원 씨가 미얀마에서 발견한 대우 BF101 버스. 겉만 빼고 대부분 개조됐 지만 이 씨는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했다. 이종원 씨 제공
그는 이런 버스 사진과 자료를 모아 한국판 ‘버스대백과사전’을 집필하는 게 목표다. 왜 이토록 버스를 좋아하는 걸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은 “산간벽지까지 다니던 서민들의 발이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영국 등 해외 국가에서 버스를 문화재로 지정해 국경일 등에 시승행사를 한다는 얘기도 해줬다.

“옛날 버스를 타본 어린이들은 역사체험을 하고 윗세대와 소통할 기회도 생기죠. 세대 간 골이 깊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매개로 소통할 기회가 생기면 좋을 텐데….”

버스 덕후의 철학에 감화될 즈음 기자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덕후의 진짜 조건 중 하나가 ‘일반인 코스프레’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덕후는 아무 곳, 아무 때나 덕후임을 뽐내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일반인인 척’하는 ‘일반인 코스프레’를 한다고.

화제를 여자친구 얘기로 돌리며 여자친구에게 덕질 자랑을 하는지 넌지시 유도해 봤다.

“친구들하고 거리를 걷다가 희귀 버스가 지나가면 무조건 카메라를 들고 찍어요. 하지만 여자친구랑 있을 땐 안 그러죠. 상대에 대한 배려기도 하고 버스보다 더 좋아한다는 인상을 줘야 제가 버스를 더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거든요. 하하.”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버스#덕후#덕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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